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发表于 2010-5-29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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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er 专题
http://movie.naver.com/movie/mzine/cstory.nhn?nid=826&page=1( x }7 c' D2 `. ^' f8 v5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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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 ?2 I' R4 N, K+ a' F/ L V한국을 대표하는 멜로드라마의 장인이었던 곽지균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기에 더욱 안타깝고, 더 이상 영화를 만들기 힘든 현실을 견디지 못했다는 사실에 더욱 마음 아프다. 20년 동안 10편의 영화를 만들었던 곽지균 감독. 그의 영화 인생을 뒤돌아본다.; M/ H7 g& v& A$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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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감독론 3] [키노 감독사전] [한국영화 감독사전] 등을 참조했습니다.- D, ^8 [5 I: c" E/ |. 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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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불렀던 청춘 비가, 영화감독 곽지균, 195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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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R1 K' v# N+ J. p영화를 사랑했던 내성적인 소년9 |5 O$ R4 X% Q2 N)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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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 z* u& U( q! f! A7 {+ E' }& o젊은 시절(1986년)의 곽지균 감독(왼쪽 사진). 조문진 감독의 [고가](오른쪽 사진)의 스크립터로, 그는 충무로 생활을 시작한다.( r' U! a. |" y& }# Q
1954 년 11월 10일 대전에서 태어난 곽지균(본명 곽정균) 감독의 유년기나 청소년기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다. 4남 1녀 중 막내였고,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내성적인 소년이었다는 것 정도? 단 하나 취미가 있었다면 영화, 특히 한국영화를 보는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미래의 영화감독'을 꿈꾸었던 건 아니었다. 당시 그는 영화 만드는 건 다른 세계의 일이라고 생각했고, 사교성 없는 조용한 소년은 극장의 어둠 속에서 영화라는 친구를 만났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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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I0 @+ L# I( O6 W: n. w그는 당시 영화 보기를 통해 다른 세계를 접했다. 스크린을 통해 접한 다양한 풍경과 세계는 그의 내면 세계를 형성했고, 그의 감수성을 형성했다. 결국 그는 영화를 선택하게 되는데, 결정적 계기는 고등학생 시절에 찾아왔다. 당시 이유 없이 몸에 열이 나는 병을 앓았던 그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일상 생활도 하기 힘들 정도였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후유증은 오래 갔다. 그런 와중에, 곽지균 감독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때 힘겹게 떠올린 단어가 바로 '영화'였다.) R9 ?! D" ]; {'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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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지균 감독은 서울예전 영화과로 편입한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 시기를 이렇게 말한다. "20세 전후 무렵, 남들처럼 평범하게 얹혀 지내던 일상의 맥이 툭 끊어지고 돌연한 변화들이 닥쳐왔다. 바로 그때 의식의 저 밑바닥에 잠재해 있던 미학들이 낯선 이방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성큼 내 것으로 다가왔다."' x6 Y1 s0 T3 r I4 u9 k3 P9 }8 ]
# l4 p" c9 }* @곽지균 감독은 졸업 후 1977년부터 충무로 연출부 생활을 시작한다. 첫 현장은 조문진 감독의 [고가](1977). 당시 집안의 반대가 심했는데, 아버지는 몸이 약한 아들이 힘든 생활을 견디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첫 영화가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8년 동안 총 18편의 영화에서 연출부 생활을 한다. 통솔력과 원만한 대인 관계를 필요로 하는 현장 탓에 내성적이었던 성격도 조금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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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O" D) \$ @5 S0 \+ n( b조문진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78) [슬픔이 파도를 넘을 때](1978) 연출부를 거친 후 만난, 임권택 감독의 연출부 생활은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다. 4년 동안 [가깝고도 먼 길](1978) [깃발 없는 기수](1979) [신궁](1979) [내일 또 내일](1979) [짝코](1980) [복부인](1980) [만다라](1981) [우상의 눈물](1982) 등의 작업에 참여했는데, 곽지균 감독은 임권택 감독과의 작업을 "연출 수업뿐만 아니라, 인간성 회복이라는 주제를 한 연출자가 어떻게 풀어나가는가를 관찰할 수 있었던 계기"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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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f D' d/ o. @6 z& y" C노세한 감독과의 작업은 그가 시나리오 수업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탄야](1982)의 각색으로 시작해, [장대를 잡은 여자](1984) [사슴 사냥](1985) 등의 영화에 그는 연출부 겸 시나리오 작가로 참여한다. 그리고 거의 동년배인 배창호 감독의 조감독이 되어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 [깊고 푸른 밤](1984)를 마친 후 데뷔를 준비했다. 첫 영화는 최인호 원작의 [겨울 나그네](1986). 1986년 4월 12일에 개봉된 이 영화는 서울 관객 40만 명을 넘긴, 요즘 기준으로 본다면 전국 500만 명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고, 1986년 한국영화 흥행 1위 자리에 오른다.8 c4 T$ ~3 s'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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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개봉 전 어느 인터뷰 한 토막을 소개하려 한다. "영화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곽지균 감독은 이렇게 대답했다. "산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 구도와 같은 것. 삶에서 느끼는 고통과 부조리, 희열 등을 진실한 감동의 차원으로 포착하는 것." 그리고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가"라는 질문엔 이렇게 대답했다.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정교하게 해부하는 작품. 가능하면 인간적인 구원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려 한다."3 y/ M, d8 s- f. @; X! x7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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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4 |: ^3 s7 s1 q3 w[겨울 나그네], 곽지균의 청춘 비가( R) y/ l) J# V9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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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최인호의 소설을 영화화하는 건 흥행을 보장받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나, 곽지균 감독이 데뷔작으로 처음부터 [겨울 나그네] 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작가가 더 적극적이었다. [깊고 푸른 밤]를 인연으로 알게 된 곽지균 감독에게 최인호 작가는 자신의 소설 [겨울 나그네]를 연출해보라고 했던 것. 곽지균 감독은 자신이 연출하기엔 원작이 너무 감상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최인호 작가는 곽지균 감독 스스로도 발견하지 못한 그 어떤 감수성을 보았다. 이후 곽지균 감독은 데뷔작에 대해 "영화 공부를 할 때는 영화미학이 풍부한 작품을, 조감독 시절엔 존재론에 대한 접근을 하고 싶었다"며, "[겨울 나그네]를 하고 난 후, 감성과 서정성이 내게 잘 맞음을 깨달았다. 최인호 작가가 이 잠재력을 찾아주었다"고 말한다.) E# q9 U1 o) n8 H# P( C2 V
/ p$ D3 p4 S3 M. B+ b% q[겨울 나그네]는 당시 진정 새로운 영화였다. 한국영화가 한창 에로티시즘으로 치닫고 있던 시절, 이 영화의 섬세한 감성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울렸다. 긴 조감독 시절에 쌓은 내공은 섬세한 연출로 드러났으며, 당대의 A급 스타였던 안성기와 이미숙, 한참 각광받던 떠오르는 신예인 강석우와 이혜영이 빚어내는 앙상블도 뛰어났다. 곽지균 감독은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했고, 충무로는 재능 있는 신인 감독 한 명을 보유하게 되었다.' [! a) g# Y/ f4 t! a, v
5 N, c! F3 t: z- J[겨울 나그네]는 단순한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당시 젊은이들을 위로하는 작품이었다. 198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특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인데,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그때는 젊은이들에겐 잔인한 시기였다. 그들에겐 도피처가 필요했고, 자신들의 좌절을 위로해줄 손길이 필요했다. 이때 [겨울 나그네]가 등장했고, 이 영화가 지닌 '낭만적 비극'의 톤은 크게 어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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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대학생 민우(강석우)는 우연히 다혜(이미숙)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괴짜인 현태(안성기)는 민우의 든든한 선배. 하지만 민우는 자신의 어머니가 양공주였다는 걸 알게 되고, 기지촌에서 일하는 은영(이혜영)이라는 여자를 만나 충동적인 사랑에 빠진다. 한 차례 사건을 겪고 감옥 생활을 하게 되는 민우. 출감 후 그는 은영이 자신의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다혜와 현태는 결혼한다. 범죄 세계의 일원이 된 민우. 그는 허망한 눈빛으로 죽음의 돌진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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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지균 감독은 [겨울 나그네] 가 "우리가 죽이고 있는 순수에 대한 이야기"라며, "파멸해가는 순수를 에워싸고 우리의 분신들이 벌이는 사랑과 그 양면성에 대한 해부도"라고 말한다. 이 영화엔 이후 곽지균 감독의 영화에서 반복되는 모티프들이 들어 있는데, 청주대학교 김수남 교수는 그것을 "죽음과 절망, 상처받은 자의 아픔, 허무주의"로 요약하며, 여기엔 "새로운 희망"도 제시됨을 지적한다.5 |8 R* H# {( g3 s+ A#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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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겨울 나그네]엔 곽지균 감독의 두 가지 강점이 드러난다. 먼저 '음악'이다. 곽지균 감독은 당시 충무로에서 영화음악에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감독이었고, 이것은 그의 멜로를 더욱 촉촉하고 감각적으로 만들었다. [겨울 나그네]에선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에게 편곡과 연주를 부탁했다. 두 번째 작품이었던 [두 여자의 집](1987)에 흘렀던 김수철의 영화음악은 당시로선 파격적이며 신선했다. [상처](1989)에선 당시 최고의 대중음악가였던 이범희에게 음악을 맡겼고,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녹음했다. [젊은 날의 초상](1991)에 흘렀던 김영동의 영화음악도 당대의 인상적인 사운드였다. & r/ R/ k) M* @0 O
. @. F4 T6 `0 X) R그리고 곽지균 감독은 '배우의 감독'이었다. 수많은 배우들이 그의 영화를 통해 충무로에서 탄탄한 발판을 마련했다. [겨울 나그네]의 강석우와 이혜영(대종상 여우조연상)을 비롯, 정보석은 [그후로도 오랫동안]과 [젊은 날의 초상]으로 영화배우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고, 배종옥은 [젊은 날의 초상]으로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떠올랐다. 김래원은 [청춘](2000)으로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을 수상했다." q( J7 V1 C9 Y' q# z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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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곽지균 감독의 섬세한 연출은 여배우들에게 어필했고, 이것은 멜로드라마 감독으로선 매우 큰 강점이었다. [겨울 나그네]와 [두 여자의 집] 에 출연했던 이미숙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곽지균 감독님은 여성적이고 섬세하시죠. 저처럼 느낌으로 연기하는 사람은 곽 감독님의 계산적인 스타일에서 많이 벗어날 수도 있었거든요. 하지만 감독님은 '이미숙'이라는 배우에 대해 파악하시고 약간은 여유 있게 연기 지도를 하셨어요." 곽지균 감독은 자신의 틀에 배우를 맞추기보다는 배우의 개성을 고려해 전반적인 조화를 추구하는, 당시 충무로에선 보기 드문 연출 스타일의 감독이었다.9 h" {5 ^! J4 n% n9 h% M9 h, ], Q$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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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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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지균 감독은 데뷔 때부터 충무로에서 '행운아'라는 평가를 받았다. 줄곧 A급 스타를 캐스팅할 수 있었고, 태흥영화사나 동아수출공사 같은 이름 있는 제작사와 작업했으며, 2억 원이 넘는 제작비는 꽤 큰 규모였다. 하지만 간과해선 안 될 부분은, 이것은 20편에 가까운 조감독 생활을 통해 쌓은 내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 경험을 토대로 매우 꼼꼼하게 촬영을 준비했고, 시나리오 작업도 최대한 만전을 기했으며, 제작 일정이나 제작비 관리도 철저했다.% ?1 |: ]+ }2 f5 `4 W
! B [( b7 o" @, l' P& f2 M곽지균 감독은 두 번째 작품으로 [두 여자의 집] 을 선택한다. 자매인 유화(한혜숙)와 유경(이미숙), 그리고 유연히 동거하게 된 남자 민준(강석우) 사이의 삼각관계를 그린 이 영화는 전작과는 사뭇 다른 톤의 작품이었다. 여기서 곽지균 감독에 대해 오해해선 안 될 부분은, 그가 '멜로를 위한 멜로 감독'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멜로라는 장르 이전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만들어내는 관계에 관심 있었으며, 멜로는 그 관계를 관객에게 좀 더 쉽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물론 여기엔 곽지균 감독의 감수성과 멜로가 잘 맞아떨어졌다는 점도 무시하진 못한다). 그래서 그의 멜로엔 신파와 최루성 설정은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삼각 혹은 사각으로 이루어진 '관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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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그네] [상처] [청춘] [장미의 나날](1994)은 두 남자와 두 여자의 관계였다. [두 여자의 집]은 두 여자와 한 남자의 관계였고, [깊은 슬픔]과 [이혼하지 않는 여자](1992)는 한 여자와 두 남자의 관계였다. [그후로도 오랫동안]이 한 여자와 세 남자의 관계라면, [젊은 날의 초상]은 한 남자와 세 여자의 관계였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 그는 사랑, 우정, 질투, 좌절, 욕망, 미련 같은 다양함 감정과 심리를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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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그네]부터 [젊은 날의 초상]까지, 곽지균 감독은 끝없는 자기 반성의 시간을 기진다. 그는 [겨울 나그네]가 지나치게 감상적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두 여자의 집]에선 좀 더 심리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심리적인 면에 치중하다 보니 드라마 전개에 있어서 문제가 생겼고 그 결과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생각해, [상처]에선 둘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영화의 스토리를 훨씬 더 깔끔해졌지만, 깊이가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특히 원작자인 김수현 작가는 감독에게 "한 템포 느리다"는 충고를 했고, 네 번째 영화 [그후로도 오랫동안]에선 좀 더 리듬감 있고 역동적인 면에 신경을 쓴다(하지만 동적인 장면의 연출에선 부족함을 느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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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후로도 오랫동안]은 특기할 만한 영화다. 수미(강수연)은 남자친구 진우(정보석)가 보는 앞에서 불량배들에게 윤간을 당한다. 이후 유학을 떠난 그녀는 7년 만에 돌아오지만, 과거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녀는 낮엔 학원 강사로 일하고, 밤엔 클럽을 전전하며 즐기는 이중 생활을 한다. 이때 그녀 앞엔 세 남자가 있다. 옛 연인이었던 진우, 그녀가 강의하는 학원의 수강생인 강호(김세준) 그리고 허무주의에 빠져 있다가 삶의 신념을 지니게 된 현욱(김영철). 여기서 곽지균 감독은 고통을 극복해야만 진정한 사랑과 희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영화에서 반복되는 모티프인데, 고통은 삶의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기 위한 통과의례이며, 그러기에 그의 인물들은 방황하고 극단적인 경우엔 죽음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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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지균 감독이 스스로 세상과 이별한 지금 이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자살의 모티프는 종종 등장했다(그렇다고 이런 설정들이 감독의 죽음을 예견했다는 건 절대 아니다). 곽지균 감독은 이 부분에 대해 "관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상대방에 지나치게 집착할 때 오는 파국"이라고 설명한다. [그후로도 오랫동안]에서 진우가 수미에 대한 이기심과 집착으로 결국은 자살하게 되는 건 그런 이유다. 이것은 "사랑에서 상대에게 가지게 되는 이기주의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사랑의 관계에서 그런 집착과 절망만 있는 건 아니다. 수미는 과거를 딛고 일어서며, 이때 현욱은 수미에게 "인생의 구원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2 d( Z& p+ a9 e2 A
, O) D# a" y- t그는 삶의 의미에 대해 묻는 만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도 물었던 셈이다. 1993년에 영화월간지 <영화>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 번도 의도적이진 않았어요. 대부분 원작이 있는 것을 영화로 만드는데, 이상하게도 주인공들이 다 죽는 작품들이에요. (중략)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난 상당히 불교 철학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요. 무상함에서 오는 니힐리즘이 아직 설익어서 그렇게 나타나고 있나 봐요." 특히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겪었던 느낌과 생각이 자신의 초기 영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하는데, 특히 [두 여자의 집]과 [상처]에 무의식적으로 배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일련의 경험을 통해 삶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었고, 그러한 초연한 자세는 영화에도 스며들었다.7 f" |9 f/ W0 F8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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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초상] 은 그의 작가적 세계가 어느 정도 완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여기서 감독은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문열의 자전적 소설의 배경을 1980년대로 바꾸고, 역시 이문열의 소설인 [그대 다시 고향에 못 가리]를 고향 집 에피소드로 결합한다. 주인공 영훈(정보석)은 [겨울 나그네] 의 민우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감독 자신의 20대가 투영된 인물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이면서 일종의 청춘 영화이며, 감독은 청춘의 시기를 "이율배반의 시기이고 예민하고 섬세한 시기이기 때문에 상처받기 쉬운" 연령대라고 본다. 이 영화에서 영훈의 방황과 고뇌는 단순하지 않다. 그는 가난과 첫사랑의 상처와 계급적 갈등 속에서 고민한다. 어쩌면 그 고민은, 20대이기에 마땅히 지니는 그 무엇이며 감독은 자신의 분신이 영화 속에서 그것을 극복하는 걸 조용히 지켜본다. 그리고 영훈에겐 어머니 같은 존재였던 정님 누나(이혜숙)는 영훈에게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진정한 시작"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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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곽지균 감독은 "[겨울 나그네] [젊은 날의 초상] [청춘] 은 '통과의례 3부작' 같은 영화들"이라고 말했다. [겨울 나그네]로 시대의 상처를 짊어진 젊음의 고뇌를 그렸고, [젊은 날의 초상]으로 본질적으로 방황기인 스무 살 전후의 시기를 보여주었다면, 미처 그리지 못했던 청춘의 코드인 '섹스'를 보여준 것이 [청춘]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청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수인(김정현)이었지만 또한 자효(김래원)이기도 했다. 내가 극복하지 못했던 것을 자효를 통해 극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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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B, d4 C2 F1 F, }1 J불혹의 나이에 만난 모색의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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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한국영화는 격렬한 변화를 겪는다. 대기업과 금융 자본이 들어오면서 영화는 점점 트렌드와 컨셉트를 중시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까지 존재했던 충무로의 구체제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로맨틱 코미디와 조폭 액션 장르가 떠올랐고, 대중은 예전처럼 멜로적 감수성을 즐기진 않았다. 이런 변화 속에서 곽지균 감독은 위기를 겪게 된다. 1992년의 [이혼하지 않는 여자]는 흥행에 실패했고, 미스터리 장르를 시도했던 [장미의 나날](1994)도 좋은 평가를 얻지 못했다. 다시 멜로로 돌아간 [깊은 슬픔](1997)의 흥행 참패는 그를 더욱 궁지로 내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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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 z- @0 O8 L7 O4 u! U곽지균 감독의 하강기가 1992년부터 시작된 건 조금은 의미심장하다. 1992년은 [결혼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충무로에 이른바 '기획영화'라는 것이 시작되었던 해. 그러면서 신인 감독이 대폭 등장해 신세대 관객들을 위한 영화를 내놓았고, 한국영화는 제작자와 관객 모두 급격한 변화를 시작하는 시점이 바로 199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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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충무로에서, 1980년대에 데뷔한 감독들은 '중견'이라는 이름을 달기도 전에 어정쩡한 위치에서게 되었다. 이것은 현재 1990년대에 데뷔한 감독들이 겪는 딜레마와 똑같은데, 곽지균 감독은 [키노 감독사전]의 앙케이트에서 "할리우드와 유럽, 그리고 그 이외의 지역이 아닌 바로 이곳 한국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지나칠 정도로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다. 한 사람의 감독이 성숙하고 변화할 시간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 그래서는 영화가 삶의 반영이 될 가능성이 너무 희박하다. 한 사람의 수명은 백 년도 안 되지만, 한 감독의 수명은 그것의 10퍼센트도 못 되다니…."# B( z. O, N/ } s8 G* V
# C( K4 P+ x. f5 d이런 맥락에서 그가 [깊은 슬픔] 을 만들면서 겪었던 일은 안타깝다. 당시에 대해 그는 2000년 즈음에 이렇게 회상했다. "[깊은 슬픔]을 만들 때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정통 멜로드라마로 만들려고 했지만 (투자사와 제작사에서) 무리하게 액션을 요구하는 바람에 영화 자체가 이상해졌다. 1990년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많은 중견 감독들이 힘든 시기를 겪었다." " R' \0 u) T0 N5 V, S& g5 y) v8 l% d;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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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원작에 곽지균 감독이라는 조합으로 많은 관심을 끌었던 [깊은 슬픔]이 서울 관객 1만 명을 겨우 넘기는 성적으로 마감된 후, 그는 3년의 공백을 딛고 [청춘] 을 내놓았다. 곽지균 감독은 이 영화를 "개인적으로 피해가고 싶은 영화인 동시에 넘어야 할 산"이라고 표현했다. 청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데 있어 '섹스'라는 부분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나이 30대 초에 [겨울 나그네]를 만들어 시대의 상처를 짊어진 젊음의 고뇌를 그렸다면 4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 오히려 그 자체로의 '청춘'을 마주볼 수 있을 것 같다. [청춘]은 청춘의 문 앞에 서 있는 2000년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청춘 예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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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그는 다시 20대로 돌아간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치열했던 시기로의 회귀이며, 영화감독으로서 초심을 되살리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그는 이 영화에서,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청춘 그 자체'를 맞닥트린다. [겨울 나그네]와 [젊은 날의 초상] 이 우회적이었다면, [청춘]은 매우 직접적이었고 그 과정에서 섹스와 욕망은 피해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서울 관객 10만 명이 조금 안 되는 흥행도 조금 아쉬웠지만, [청춘]에 대한 가장 아쉬운 건 평단의 반응이었다. 적지 않은 평론가들이 [청춘]을 두고, 한 중견 감독이 재기를 위해 섹스를 이용한다고 평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곽지균 감독은 다음 영화이자 이제 유작이 된 [사랑하니까, 괜찮아]까지 6년을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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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F% m$ w1 ?물론 그 사이에 여러 시도들이 있었다. 2002년엔 설원에서 펼쳐지는 발레리나와 스키 선수 사이의 판타지 멜로인 [하나에]가 있었고, 2003년엔 어린 시절 친구의 죽음을 겪은 주인공이 시간이 흐른 후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의 [보해]라는 영화가 있었다. 김래원의 캐스팅도 결정된 상태였다. 하지만 두 프로젝트는 모두 무산되었고, [사랑하니까, 괜찮아]는 대중의 무관심 속에 사라졌다. ; b- o6 c. o: T
4 m! u( `7 R$ ?; P+ _"열 작품 정도는 해야 자기 자신에 대한 정리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곤 했던 곽지균 감독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열 번째 영화인 [사랑하니까, 괜찮아] 를 남기고 관객과 영영 이별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좋은 사람'이었고, 자신의 인생에 충실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영화를 위해 산다는 생각은 생각은 없고, 다만 사는 것처럼 영화를 만들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왜 당신의 남성 캐릭터들은 대부분 섬약한 남자들이냐"는 질문엔 "제가 약한 남자이기 때문은 아닐까요?"라며 멋쩍게 웃기도 했다. 영화감독으로서의 능력이나 흥행적 감각 같은 부분은 여러 평가가 엇갈릴 수 있겠지만, 최소한 그는 정직하게 살고 그 삶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며, 그 안에서 자신의 고민을 관객과 공유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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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답게'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1986년부터 2006년까지, 그가 활동한 20년은 그야말로 한국영화의 격동기였다. 그는 에로티시즘이 판 치던 시기에 데뷔해, 사회파 리얼리즘 영화와 기획영화 컨셉트의 로맨틱 코미디와 블록버스터 대작과 액션 스펙터클 영화로 트렌드가 바뀌는 와중에, 조용히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길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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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 감독사전]의 앙케이트엔 "당신의 묘비명을 스스로 쓴다면?"이라는 질문이 있다. 여기에 곽지균 감독은 이렇게 대답했다. "영화로부터 자연으로 돌아가다." 하지만 이 말은 그의 유언이 되지 못했고, 그는 "일이 없어서 괴롭고 힘들다"라는 말을 남겼다. 부디 그 괴로움을 벗어두고, 편안히 자연으로 돌아가시길. 다시 한 번 그의 명복을 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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