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很长的一篇评论~~
一个帖子不够 = =
이 잔인한 놀이는 네 책임이다.
그것들은 내 어두운 굴에서 도망친다.
너는 모든 걸 채운다, 너는 모든 걸 채운다.
너를 보기 전 그것들은 네가 차지한 고독에 붐볐고
너보다 더 슬픔에 익숙했다
이제 나는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을 그것들이 하기를 바란다
네가 나를 듣기를 내가 바라는 대로 네가 듣도록
고통의 바람이 늘 그렇듯 여전히 그것들에 불어온다.
때로는 꿈의 허리케인이 그것들을 뒤집어엎는다
너는 내 고통스러운 목소리 속에서 다른 목소리들을 듣는다
오래된 입들의 비탄, 오래된 간청의 피.
나를 사랑해다오, 친구여. 나를 떠나지 말아다오. 나를 따라다오.
나를 따라다오 친구여. 이 고통의 파도 위에서.
- 파블로 네루다, "그리하여 너는 나를 들을 것이다" 중에서
1. “그리하여 너는 나를 들을 것이다”: 복수라는 이름의 절대적 소통
<마왕> 20화의 최후 십여 분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지켜보면서도 차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의 진의를 믿지 못해 머릿속이 하얗게, 정말로 새하얗게 비어버렸다.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이 완벽한 서사의 매듭. 진정한 의미의 종지부. 텍스트 전체를 완전히 다시 새로 써버리는, 이 절대적이고 폭력적인 엔딩이라니. 19화하고도 50분을 치달려 오는 동안 꼬리를 물던 그 무수한 해석들을 모조리 불완전한 오독으로 만들어버리고, 텍스트 전체에 절대의미를 새겨버리는 엔딩이라니. 이 엔딩이 없이는 아무 것도, 그 어떤 해석도 가능하지 않은 텍스트라니. 세상에, 두세 시간짜리 영화도 아니고, 20부작 TV 드라마가, 최후 십분 동안의 엔딩으로 바야흐로 완성되고 존재의미를 찾는 유기성을 꿈꾸었다니. 복수하는 자와 복수를 당하는 자가 역전되고, 죄인과 심판자가 역전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역전되고, 용서하는 자와 용서받는 자가 역전되고,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눈에 보이는 진실과 보이지 않는 진실의 구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절대현현의 순간. 처참하고 슬퍼도 철저히, 정말이지 철두철미하게 행복한, 오로지 모순어법으로만 형용할 수 있는 이 기막힌 엔딩에서 20회를 고단하게 달려온 서사의 타나토스와 에로스는 장렬하게 합일했고, 그 합일은 차마 영영 잊을 수 없으리만큼 아름다웠다. 그 비극적 합일 속에서 이 드라마는 우리가 언젠가 포기해버렸던 그 신기루 같은 꿈, 한 인간과 또 다른 인간 사이의 궁극적 소통, 그로 인한 구원을 기어이 실현해 보여주었고. 그 엄청난 여운에 밤새도록 멍하니 잠 못 이루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용광로처럼 아우성치며 들끓던 서사적 욕망들을 전부 온전히 충족시켜 평화로이 잠재워 버린 이 피투성이 엔딩의 의미는 복수극이라는 장르 자체의 철학적 본질을 완전히, 전적으로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새로운 장르적 사유는, TV 드라마라는 그 어떤 서사형식보다 통속적인 서사형식을 통해 그 어떤 서사보다 깊고 엄정하면서도 중층적인, 인간성에 대한 사유를 이끌어내고 있다는 것을
오수와 함께 쌍생아처럼 닮은 꼴로 나란히 기대어 죽어가는 그 엔딩은, 정태성/오승하가 꿈꾸었던 복수극의 완벽한 완성이 분명했다. 이 완결을 염두에 두고 처음부터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 정태성/오승하가 복수극을 추동한 결핍 혹은 욕망의 참된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생각해 보면, <마왕>에서 가장 섬뜩하고 끔찍한 대사는, 이상하게도 복수극을 표방한 오락물들에서 우리가 수도 없이 들어왔던 바로 그 대사였다. “이제 다 끝나가, 태성아. 정의가 승리하고 있어. 태훈이도 기뻐할 거야. 우리가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놓는 거야.” 김영철의 이 말을 듣는 정태성/오승하의 눈에는 왈칵 공포와 연민의 눈물이 차오른다. 영철의 쾌감은 오랜 피학 끝에 형체를 알 수 없이 일그러진 그의 영혼이, 이 명분 뒤에 숨어 흉측하게도 가학에 도취되었음을 보여주기에 섬뜩하고 소름끼친다. 하지만 정작 정태성/오승하는 복수의 대상이 하나씩 죽어나갈 때마다 즐거워하기는 커녕, 점점 더 수렁처럼 깊은 슬픔에 빠져들어간다.
그렇다면 그는 정작 무엇을 원했던 걸까. 정의의 승리를 원한 게 아니라면, 스스로 자신을 더럽히고 타락하면서까지, 종국에는 자기 목숨까지 담보로 잡힐 각오로 복수하는 자가, 그 아픈 영혼으로 원하는 건 대체 무엇일까. 무엇이 그 영혼의 바닥 모를 슬픔을 달래줄 수 있을까. <마왕>의 엔딩은 무엇보다, 복수자는 복수극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고통과 불행의 절대적인 소통을 꿈꾼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마왕>은 불행한 자의 절대고독, 그 아픔의 소통 불가능성을 일말의 환상 없이 직시한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기존의 인간관계, 특히 사랑, 우정, 연민, 그리고 순수한 호의와 친절마저도,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자의 슬픔을 위로하고 영혼을 채워줄 수는 없다고, 한없이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가차없이 단언한다. <마왕>은 용서라든지 사랑이라든지 이해라든지 정의 같은, 그런 말들을 쉽사리 뱉어내는 모든 가벼운 서사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승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또 이해하고자 하지만, 해인과, 승희와, 광두는 한없이 무기력하다. 선의는 무의미하지 않으나 힘이 없고 허망하다. 정태성의 입장도 이해할 수는 있겠다고 선한 사무장, 혹은 사마리아 사람 차광두가 말하자,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를 것 같습니다”라고. 선하지만 불행을 모르는 사람들의 호의와 친절은 오승하에게 위안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잠자고 있던 죄의식과 생에 대한 집착을 한꺼번에 일깨우며 그를 점점 더 피로하고 고단하게 만들 뿐이다. 절대적인 불행 속에서 그는 무섭게 외롭다. 이제는 용서하라는, 그리고 너를 찾으라는 그들의 호소는 왜 이렇게 울림이 공허한가. 하지만 이렇게 언어가, 상상력이, 연민이, 사랑이, 우정이, 그리고 믿음이 실패한 바로 그 자리에 서서, 복수는 폭력적으로 소통을 완성해낸다.
이리하여 김지우와 박찬홍은 놀랍게도 복수극에 내재한 진정한 인간적 욕망의 심층심리를 발견해 내고 말았다. 받은 대로 고스란히 불행을 되갚아주겠다는 복수극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과 똑같은 불행에 빠진 쌍생아, 자신의 불행을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의 단 한 사람을 만들어내는데 있는 게 아닐까, 라고. 해인에게 “난 누구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던 태성은 자신의 복수극으로 인해 태어난 자신의 쌍생아, 세상에 자기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퇴행한 어린애처럼 울부짖으며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그리고 호루라기를 불어 지상의 연인과 삶을 계속하는 대신, 자기가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와 함께 죽어가는 편을 선택한다.
<마왕>에서 복수는 사회와 세계가, 법과 언론과 정의가, 연민이, 그리고 사랑이 실패한 원죄의 자리에서 발원한, 극단적으로 폭력적이고 절대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끔찍한 형태다. 누군가의 죄과로 인해 한순간에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한 존재는, 어느 순간 그가 억울하게 갇혀 버린, 다른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불행 속에서 절대적으로 고독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그 절대고독 속에서 삶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 고독과 불행을 타인/가해자에게 소통하고자 갈구하며 복수극을 벌인다. 하지만 이 소통은, 필연적으로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일 수밖에 없다. 자신이 받은 대로 똑같은 불행을 돌려주고 싶다는 욕망은, 나 역시 그와 꼭 같은 가해자가 되는 대가를 감수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왕>이 바라보는 이 양면성은 이 드라마를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복수극으로 만든다. 치졸하면서도 숭고하고, 저열하면서도 아름답고, 죄를 짓고 살아가지만 목숨의 가치가 있는, 불쌍하고 불쌍한 존재로서의 인간성에 대한 길고 긴 깨달음의 여정으로. 그래서 승하는 자기가 꾸민 복수극을 통해 오수로 하여금 자신을 이해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불가피하게 오수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아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라는 이 엄정한 명제는 얼마나 무섭고 외로운가. 어쩌면 마지막 십분 동안, 모든 것이 시작된 원점, 어두컴컴한 폐차장에서 오승하와 강오수가 대면해 성취하는 오로지 두 사람만의 진실, 그 절대적인 공감대는 어쩌면 대중 픽션에서 쉽사리 자아내는, 손쉬운 환상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첩혈쌍웅> 같은 홍콩 영화들에서 보여지는, 멋진 남자들의 쿨한 연대, 그런 식상한 이미지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고단한 이야기의 추이를 따라온 사람들에게 이 엔딩이 묵직한 현실의 무게를 짊어질 수 있는 건, 두 사람이 복수라는 과정을 통해 서로의 고독한 고통에 가까이 다가가는 지난한 19화 50분의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고, 법적으로 죄과를 치르지 않아도 되는, 완벽한 계획을 짜낸 루시퍼 오승하가 복수극이 진행되면서 울고 흔들리는 건, 죄지은 자의 가책이라는 걸 상상만으로는 차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승하의 불행이 겪어보지 않은 자는 차마 모르는 것인 것처럼, 오수의 가책 역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 고통이었음을 증명한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무섭고 엄정한 전제 하에서 복수극은 진행되고, 그러다 제 목숨 따위 초개같이 던질 생각을 하고 있던 승하는 못나고 지질해지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살아보고 싶었던 오수의 집착도 이해하게 된다. 어쩌면 승하는 자기 목숨의 진짜 값어치를 몰랐기에 타인의 삶도 가볍게 저울질했던 게 아닐까. 그는 자기가 눈앞에서 사라질까봐 노심초사하는 여자와 감자전을 먹고 팥빙수를 먹으며 위로를 받고 소소하게 살아가는 기쁨도 이해하게 된다. 그 기쁨을 이해하면서 오수의 망각마저도 이해하게 된다. 복수를 당하는 오수 역시 처음에는 머리로, 말로, 다음에는 심장으로, 나중에는 온 존재로, 억울하게 삶을 앗긴 피해자 태성의 불행, 그 끝모르는 심연같은 절망을 차츰차츰 배워간다. 태성이 겪은 불행 속에 오수가 서고, 오수의 불행 속에 태성이 서는 마지막 순간, 두 사람은 한 치의 차이도 없이 똑같은 모습이 되어버리고 서로를 완벽하게, 그야말로 완벽하게 이해한다. 타인을 자기 자신처럼, 자기 자신을 타인처럼 아파하고 연민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그 순간, 그제서야 용서와 사과는 진의를 찾는다. 태성의 절대고독이 마침내, 피투성이의 절대적 소통을 이뤄내고야 만 것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서로를 듣고야 만 것이다. 고통의 파도 위에서 피흘리며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채우고야 말았다. 바로 그래서, 정태성/오승하의 복수극은 슬프고 잔인하고 참혹할망정 결코, 결코 허망할 수 없다.
2. “보이는 진실과 보이지 않는 진실”: 사회와 치열하게 소통하는 <마왕>의 특별한 시선
폭풍우처럼 몰아친 카타르시스와 심해처럼 깊고 푸르른 고요와 평화. 그 뒤에 남은 것들. 이 두 사람의 완벽한 비극적 죽음에는, 우리 사회, 우리 세계, 우리의 삶, 너무나 많은 것들이 걸려 있다. 이상한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정말로 그들의 어깨에는 그 순간 우리 삶의 가치와 존재의 희망이 걸려 있다. 두 사람의 용서와 화해, 그리고 죽음은 결코 두 사람만의 것이 절대 아니다. 이것이 양파껍질보다 더 층이 많은 <마왕>의 복수극이 지니는 또 한 겹의 서브텍스트다. <마왕>이 승하의 복수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세계와 소통하는 키워드는 오만한 “정의”가 아니라 겸허한 “진실”이고, 승하와 오수의 소통과 죽음은 이것이 얼마나 성취하기 힘든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마왕>은 타인의 고통이 지니는 절대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진실을 마주하고 사심없이 대처한다는 게 얼마나 불편하고 힘겨운 일인가, 그리고 정의가 있다면 그건 타인에 대한 단죄가 아니라 오로지 진실을 마주하는 자신의 자세라는 걸 똑바로 직시한다. 사람 살아가는 세상의 진실이라는 건, 칼로 무자르듯 “정의”와 “불의”, 혹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다고 외치고 있다. 모든 이야기에는 양면이 있는 법, 그 양면이 모두 용기있게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아마 더 공정한 사회에 조금쯤 더 가까워질 거라고.
진실이 한쪽에 치우치는 메카니즘은, 그래서 더 이상 진실이 아니게 되어버리는 그 기제는, 언제나 권력과, 힘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냉랭한 직시는 승하의 복수를 사적인 한풀이 이상의 차원으로 훌쩍 끌어올린다. 그의 복수극은 자신의 불행을 포함해 이 사회에서 부당하게 침묵당하고 있던 진실(들)의 후면을 전면으로 끌어올리는 기획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타자의 이야기를 침묵시키는 법이다. 기득권을 지닌 가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선포된 정당방위라는 '공식적 진실'은, 오로지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선량한 피해자가 겪어야 하는 억울한 고통이라는 '비공식적 진실'을 뒤덮고 억누른다. "진실의 해석은 연루된 사람의 수만큼 존재한다"고 믿는 오승하의 복수극은 이처럼 부당한 진실의 헤게모니를 전복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다. 태훈의 죽음이라는 이 세계의 타락은, 힘을 남용하던 강오수로부터 시작해서 강동현의 권력으로 진실의 균형이 완전히 깨어지면서 돌이킬 수 없이 썩어들어간다. 하지만 아무도 태성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오로지 그에게 힘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적 권력과 재력과 지능을 갖춘 오승하로서 부활해 돌아온 정태성의 복수극이 시작되면서, 참담한 불행 속에 억울하게 침묵당한 이들의 목소리가 들끓기 시작한다. 복수극이 진행되면서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았던 목소리들이 전면으로 부상해 아우성친다. 언론이, 법체제가, 경찰이, 사회 전체가 실패한 바로 그 자리에서, 부당하고 침묵당한 소수의 힘없는 목소리들을 초혼한다. 조동섭도, 소라엄마도, 그리고 황대필도, 오승하의 복수극에 말려들면서 원했든 원치 않았든 스스로도 사적인 복수를 일구어내고 아무도 귀기울여주지 않던 자기 이야기를, 사람들로 하여금 강제로 듣게 만든다. 따라서 오승하가 선택한 인권변호사라는 공적 정체성은 이 복수극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첫 번째 희생자가 권력에 기생해 진실을 왜곡하는데 앞장섰던 권변호사라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변호사는 무엇보다 진실을 밝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는 대사도 다시 생각할수록 그에 걸린 무게가 범상치 않다.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강자의 권력이 만들어내는 진실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또 다시 밀리는 일이 없도록, 그들의 목소리를 공식적인 진실로 새기기 위해서, 그는 자신이 이용하는 복수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자리에 서야만 한다. 이처럼 뒤틀린 진실의 헤게모니를 바로잡는 것이 오승하가 벌인 거대한 전쟁의 목표라는 건,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성준표의 살해에 가장 직접적으로 개입한다는 데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객관적 진실을 전달한다는 미명 아래 언제나 사적인 영달과 권력욕만을 채우는 부패한 기자는, 약자의 침묵을 당연시한다는 점에서 세상의 모든 가해자들 중에서도 최악의 가해자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희생자를 내도 좋으니 정태성의 복수극을 독점취재하게 해달라는 성준표의 제안은, 성준표의 윤리적 마비상태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오승하는 극 전체를 통틀어 가장 섬찟한 악마성을 내보이며 가차없이 그를 심판한다. 하지만 오승하가 20회까지 이어지는 끝없이 고단한 터널로 들어가는 건 바로 이 순간이다. 사회적 공적인 명분으로는 도저히 덮을 수 없으리만큼, 복수의 행위를 통해 죄없는 피해자였던 복수자의 슬픈 영혼이 결국 더럽혀지는 순간. 그가 손가락에 피를 묻히는 순간, 심판이라는 이름 하에 스스로 살인자의 멍에를 덮어쓰는 순간,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암적인 존재를 제거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암적인 존재 역시 사람이고 그 암적인 존재를 제거한 사람 역시 사람이라는, 심판 역시 죄라는 인식이 깨어나는 순간. 무엇보다 자기 자신 역시 목적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고, 진실의 한 면을 강제로 침묵시켰다는 인식. 공정하다 못해 잔인한 <마왕>의 서사는, 사회의 기득권자로 전능한 권력을 휘두르게 된 오승하를 그가 타인을 단죄하는 바로 그 이유로 심판하기 시작한다.
오승하의 대극이자, 이 모든 사태의 진원지에 선 강오수의 캐릭터는 어찌 보면 <마왕>의 진정한 성취라 할 것이다. 그의 캐릭터는 전통적인 복수극의 틀을 모두 불가능하게 만든다. 누가 봐도 강오수는 그렇게 처참하게 파멸해 마땅한 악인이 아니기 때문에, 오승하의 복수극에서 우리는 어떤 쾌감도 느낄 수 없다. 더구나 오승하는 물론, 세상 누구도 모르는 그의 진실은, 그가 친구를 살해할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그 상처로 인해 지난 12년을 지옥같은 죄의식에 시달리며 용서받기 위해 죽도록 노력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승하의 복수극은 오해로 인한 무의미한 헛소동인가? 아니, 이 경우에도 진실에 대처하는 올바른 자세에 대한 <마왕>의 엄정한 기준에는 일말의 타협이 없다. 오수의 죄는 태훈이 덮어쓴 오명을 딛고 삶을 성취했다는 것, 즉, 진실을 묻은 회칠한 무덤 위에서 자기 삶을 쌓아올려왔다는 사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제 형사라는 공적인 정체성 뒤에서 세상에는 “나쁜 놈과 나쁜 놈 잡는 사람,” 이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고 믿게 된 그는 결국은 태훈의 죽음과 자신의 죄를 잊었다. 자기 삶이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태성의 처절한 고통에, 불행에, 그 부당함을 바라보지 않았고 또 끝내 눈감아버렸다. 괴로움을 잊고 고통이 사라진 순간, 그는 복수를 당해 마땅한 사람이 되었다.
<마왕>에 등장하는 강오수의 죄는, <부활>에서 권력을 탐해서, 재력을 탐해서, 그리고 사랑을 탐해서 적극적으로 타인을 해한 그 때 그들의 죄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불편하다. <부활>에서 우리는 사랑스러운 초인이자 찬탈당한 정당한 왕자 강혁/하은의 복수에 완전한 동일시를 이루고 열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왕>에서 오수의 죄는, 비인간적인 악의를 품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죄를 저질러버렸고, 그 다음에는 비겁해서 타인의 고통에 눈감아버린 우리 모두의 것이다. 내가 편하게 살고 싶어서, 지질한 행복을 일구고 싶어서, 내가 행복하려면 어차피 다른 누군가는 불행해야만 한다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저지른 죄악이기 때문이다. 고의적 상해가 아니었다고, 실수와 방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해서, 태성이 겪은 불행의 깊이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는 건 얼마나, 정말이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실수였는데, 좀 봐 달라고, 억울해하고 징징거리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인가.
초반에 <마왕>을 보는 시청자들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은 분명 멋진 주인공이어야 할 강오수가 자기 죄에 대해서 참으로 너그럽고 둔감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한 복수극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데도 강오수는 태성의 불행을 돌아보고 용서를 빌기보다는, 자기 삶을 지키는 데 급급한 모습으로 비쳤다. “그래도 살아보고 싶었다”고 그는 말한다. “내가 열심히 살면 태훈이도 언젠가는 나를 용서해 줄 거라 믿었다”고도 말한다. 자기연민에 빠져 사랑하고 싶은 여자한테서 위안을 얻어보려 애쓰기도 하고, 실수였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하기도 하고, 변명하기도 하고, 선생님 탓이라고 다른 사람들 탓으로 돌려보기도 한다. 태성이 앞에서도, 그래도 지금은 내가 형사고 너는 죄인이라고, 그렇게 흔들리는 자아를, 자존감을 추스린다. 보기에 몹시 불편하지만 이런 강오수의 모습이 죄를 짓고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실이다. 죽어도 살아보려고, 삶에 집착하는 강오수는 필연적으로 지질하고 못나 보인다. <꽃보다 아름다워>의 장인철이 강오수와 비슷한 입장에서 더 비극적이고 사랑스러워보였던 것은, 그가 애초에 자기 인생을, 삶을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쳤기 때문이다. 우린 픽션 속에나 존재하는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을 더 쉽게 사랑한다. 하지만 죽은 자를 위해 산 자가 제 삶을 포기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오수의 비루한 삶에 대한 못난 집착, 자기 연민과 기만은, 잊고 살고 싶은 우리네 흉한 뱃속에 거울을 들이대기 때문에 불편하지만 진실되다. 그리고 이러한 오수의 모습은, 시청자의 입장에서도 용단을 요구한다. 이게 네 모습이라는 걸, 진실을 인정하라고.
진실의 양면을 바라보는 이 잔인한 복수극의 양단에 선 두 사람이 사회정의를 대변하는 변호사와 형사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이 드라마가 얼마나 치열하게 공적이고 사회적인가를 보여준다. 나쁜 놈을 잡고 싶다고 배후조종자에 대한 투지를 불태우던 형사는, 종국엔 나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자기가 쫓고 있는 사람이 적인지 자신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들에게는 살인의 고의가 없었다고, 남의 목숨을 앗은 사람들을 변호하게 된 변호사는, 자기가 어느 새 자기 입으로 원수의 죄를 변호하고 있다는 자가당착을 깨달아 버린다. 죄인을 단죄하는 형사와 죄인을 변호하는 변호사는, 서슬퍼런 양날의 진실을 찾아내는, 구도같은, 혹은 천형(天刑)같은 여정에 결국 나란히 서고야 만다.
갈가리 찢기는 심장의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나희의 불륜을 밝히고, 희수의 죄를 덮지 않고 단죄하는 오수는 드디어 자아와 사심을 버리고 진실을 대면하는 형사로서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한다. 소라엄마와 나석진을 변호하면서, 오승하는 자기 입으로 오수의 죄와 자기 자신의 죄를 한꺼번에 변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걷잡을 수 없이 슬퍼져 버린다. 강동현과 마지막으로 독대하면서, 그는 진실을 방기하고 권력으로 왜곡한 강동현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지만, 부모로서 자식을 사랑하는 인간의 마음은 이해해 버린다. <마왕>은 정의를 볼 때도, 죄를 말할 때도, 용서를 말할 때도 일말의 타협을 불허한다. 정의라는 쉬운 이름으로 복수의 폭력을 미화하지 않는다. 소라엄마나 조동섭, 황대필의 죄과 역시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무화하지 않는다. 승하가 법체제에 의한 징벌을 막았을지언정, 사람의 목숨을 앗은 죄과는 지울 수 없는 것이고, 그들이 평생 떠안고 살아야 할 그 고통까지 슬픔이 되어 고스란히 승하의 어깨를 짓누른다. 승하의 머릿속에서 기획의 논리는 완벽했지만, 굳이 용서받을 희망도 없이 자기 죽음까지를 계산에 넣었지만, 다만 그 잘난 머리로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그 심장의 고통, 그 깊이. 하지만 사실 억누를 수 없는 이 슬픔이야말로 오승하를 견종철이나 강동현 같은 인간들과 가르는 심장의 진실이요, 영혼의 증표다. 자기는 살인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기 운명을 선택했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해보려 하지만, 그의 영혼은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오수는 자기가 연쇄살인자를, 배후조종자를 잡아넣겠다고, 그게 정의의 구현이라고 믿고 그에 삶의 의미를 걸고 집착하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의 원죄를 인정하고 만다. 그리하여 승하는 마지막 순간, “나는 네 형을 살인자로 만들었고 네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다”고 온전한 책임을 시인한다. 그리고 미안하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잡고야 말겠다고 전의를 불태우던 오수는 태성에게 “너를 그렇게 만든 건 나다. 고의든 실수든 중요하지 않다”라고 또한 온전한 책임을 시인한다. 두 사람은 이 순간 바로 이 힘겹고 힘겨운 성찰로 하나가 되고 우리 사회의 희망을 짊어진 영웅들이 된다. 변호사로서, 형사로서, 죄를 지은 타자를, 벌받아 마땅한 누군가를 단죄하는데 성공해서가 아니라, 그 누구보다 단죄하기 어려운 자기 내부의 적과 싸워 이기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그건 너무나 힘겨운 싸움이다. 승하와 오수가 진실을 향한 이 길 속에서 차츰차츰 서로를 닮아가는 과정은 느리고 지난하고 늪처럼 끝모를 피로로 점철되어 있다. 두 사람은 피하고 또 피하고 또 피하고 싶던 진실에 아주 천천히 다가간다. 그리고 폐차장에서 벌어진 최후의 오발사고 속에서, 날선 진실에 심장을 관통당한 그들은 세상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고통스럽고 적적한 무간지옥에 단 둘이 서 있는 서로를 짧디 짧은 순간 고개 돌리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본다. 이미 오래 전 상대를 용서해버린, 하지만 더 이상 자신의 죄과를 용서하지 못하는 두 사람이 함께 빠져들어간 이 죽음보다 더한 성찰의 고통은, 진실 앞에서 세상 누구보다 아름답고 숭고했던 두 영혼의 비극적 증표이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희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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