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发表于 2011-7-1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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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 naver blog
(就是这个剧参考的野史)
공주의 남자(세조의 딸과 김종서 손자의 사랑 )
公主的男人(世祖的女儿和与金钟瑞孙子的爱情)
2011/07/19 16:43
공주의 남자 김종서 손자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상판리 서쪽에
진터, 또는 진대(陳垈)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 부근에는 숯을 구워내는 '가마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에 세조 임금과 그의 딸에 얽힌 일화가 금계필담(錦溪筆談)에 전해지고 있다.
세조에게는 예쁘고 영리한 공주가 있었습니다. 공주는 부친인 세조가 김종서, 황보인 등 명신들을 차례로 죽이고, 어린 단종을 쫓아낸 뒤 왕위에 오른 후, 성삼문 등 여러 충신을 참혹하게 죽이자 이를 번번이 간하다가 세조의 노여움을 사서 죽게 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결국 공주는 모친의 도움으로 금은보석을 챙겨 유모와 함께 궁궐을 도망 나왔습니다. 평복으로 변장한 두 여인은 깊은 산 속을 헤메다가 충북 보은 땅에 당도했는데, 그때 나뭇짐을 짊어지고 가던 한 총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나뭇짐을 짊어졌지만, 미목이 준수한 총각은 공주와 유모를 집으로 데리고 가 하룻밤 쉬어가도록 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공주는 다시 길을 떠나려고 했지만 발병이 나는 바람에 총각의 집에서 며칠을 더 쉬게 되었고, 그곳에 있는 동안 공주는 총각의 따뜻한 인정에 감동하여 두 사람은 부부의 인연을 맺고 성례를 치뤘습니다.
그 후, 서로의 신분을 털어놓고 보니 총각은 공주의 부친인 세조가 죽인 김종서 대감의 둘째 손자로서 일가족이 살해될 때 하인의 도움으로 이곳에 은신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결국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인 셈이었으나, 부부관계를 유지하면서 선대의 원한을 잊고 골짜기에 숯가마를 만들어 숯을 구워 팔며 단란하게 살았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몹쓸 피부병에 걸린 세조는 병을 고치기 위해 전국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다 속리산까지 행차하게 되었는데, 세조 일행이 충북 보은군에 들어서자 동네 아이들이 구경을 나왔습니다. 그 중에는 공주의 두 아이들도 있었는데, 마침 세조의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세조는 두 아이의 모습이 자기가 죽이려고 한 딸의 모습과 비슷하고, 또 생긴 모습에 남다른 기품이 엿보이자 신하를 불러 두 아이의 집을 확인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평복으로 갈아입고 직접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집에 당도하여 신하에게 물 한그릇을 얻어오게 하였습니다.
이때 공주가 문틈으로 내타보니 부친 세조가 서 있었습니다. 공주는 황급히 뒷문으로 빠져나가 숯을 굽고 있는 남편에게 이 일을 알리고 아이들과 함께 깊은 산 속으로 숨어버렸습니다. 갑자기 집 안에서 인기척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된 세조는 그제야 자기 딸이 이곳에 숨어 지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조는 마을에 진을 친 뒤 군사를 풀어 은밀히 딸 내외를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천륜의 정은 어찌할 수가 없었던지 세조도 자기 딸이라는 사실은 결코 입 밖에 내지 않고 감추었다고 하며, 그때부터 이곳을 '진터'라 하고 부부가 숯을 굽던 곳은 '가마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ㅇ 금계필담 [錦溪筆談]
1873년(고종 10)에 서유영(徐有英)이 저술한 문헌설화집.
편저자 서유영
제작시기 1873년(고종 10)
조선의 역대 국왕과 조신(朝臣)들의 국사처리에 관련된 고사(故事) 및 명사들의 기행(奇行) ·기문(奇聞)을 수록한 책.
운고거사(雲皐居士)라는 익명인(匿名人)이 수집한 130여 종의 고사 ·기행 ·기문이 수록되어 있다. 수록 내용이 세종 ~ 정조 때인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저작된 것으로 보인다. 책머리에 저자의 자서(自序)가 있다.
ㅇ 세조의 속리산 피접(避接)
조선 세조는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속리산 지역으로 피접(避接)을 왔는데, 이 때 많은 설화를 남겼다.
세조와 속리산과의 역사적인 관련사항은 대궐터 및 연걸이 소나무, 목욕소외에도 가르침 바위, 미륵댕이, 북바위, 복천암, 은구석, 말티고개, 상환암, 진터 등이 있다.
△대궐터는 세조가 보은을 지나 속리산쪽의 나즈막한 고개에 올라섰을 때 노승이 행궁을 짓고 쉬어가라고 하며 사라지자 그 곳에 행궁을 지은 곳으로 행정구역상 외속리면 장재리 한옥마을이다. △미륵댕이는 노승이 나타나 세조에게 행궁터를 예언했던 고개이름으로 행정구역상 보은읍 대야리 말티휴게소 맞은 편 쪽이다. △북바위는 외속리면 장재리 독점마을 현 송어촌 식당 뒷편에 있는 바위로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북을 치던 곳이다.
△목욕소는 세조가 목욕 중에 월광태자를 만나 병이 완쾌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은 곳이다 △복천암은 세조가 피부병에 대한 요양과 국운 번창을 기원하기 위해 학조대사와 신미학열 등의 법사들이 모여 법회를 가졌던 곳이다. △은구석은 세조가 질환에서 쾌유됨을 경하하는 자리에서 복천암 앞의 돌을 끌고 가는 곳까지 산천 전답을 절 소유로 하사한다 하여 끌고가다 멈춘곳에 세운 돌이고 △말티고개는 세조가 요양하기 위해 속리산 행차시 고개 아래서 연에서 내려 말로 갈아타고 넘은 고개이다. △상환암은 복천암을 지날 때 7일 기도를 한 뒤 선왕 태조의 유적을 추모하는 즐거움이 비할 때 없다면서 명명한 곳이고 △정이품송은 속리산 행차시 “연 걸린다”는 어명에 나뭇가지가 하늘을 향해 올라갔고 속리산을 떠날 때 그 나무밑에서 비를 피할 수 있어 이를 기특하게 여기고 나무에게 정이품의 품계를 하사했다. △진터는 세조의 딸과 김종서의 손자가 숨어살던 곳으로 그들을 찾기 위해 관군들이 진을 쳤던 곳으로 정이품송 앞 동쪽 산 아래로 현재 매일우유의 사슴목장이 있는 곳이다.
ㅇ 조선왕조실록 세조의 속리산 피접
세조 32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 1월 6일(기미 ) 1번째기사순행 지응사 윤자운이 순행 사목에 대해 아뢰다
순행 지응사(巡幸支應使) 병조 판서(兵曹判書) 윤자운(尹子雲)이 순행의 사목(事目)을 의논하여 아뢰니, 어필(御筆)로 종이 끝에 쓰기를,
“길가 산골짜기에 땔나무를 쌓고 횃불을 모아 두는 일과 도로(道路)를 수치(修治)하는 등의 일을 다 금하며, 만일 명령을 어기고 아첨하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觀察使) 이하 〈모두〉 무겁게 논죄(論罪)할 것이다.”
세조 32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 1월 23일(병자 ) 1번째기사
충청도 관찰사 등에게 고을의 군사를 모아 순행을 기다릴 것을 명하다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신영손(辛永孫)·절제사(節制使) 권언(權躽)에게 유시하기를,
“도내(道內) 여러 고을의 군사(軍士)와 당번 정병(當番正兵)을 다 경계(境界)에 모아서 순행(巡行)을 기다리게 하라.”
세조 32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 3월 21일(갑술 ) 1번째기사
어가가 서울에 돌아오니 기로 판중추원사 김말 등이 가요를 올리다
임금이 환궁(還宮)하였는데, 도성에 머물러 있던 백관(百官)들이 하례(賀禮)를 행하고, 반사(頒赦)하였다. 교지(敎旨)에 이르기를,
“순수(巡狩)라는 것은 제왕(帝王)의 성사(盛事)요, 상서(祥瑞)란 지덕(至德)의 형향(馨香)6495) 이다. 내가 부덕한 몸으로 외람되게 영도(靈圖)를 받았고 자민(字民)6496) 의 정사를 아직 베풀지 못하였는데 연풍(年豐)의 경사를 여러 번 얻었으니 스스로 미덥지 아니하여 다만 공손히 삼가함을 더할 따름이다. 복천(福泉)에 이르기 전일(前日)에는 속리산(俗離山)에서 방광(放光)6497) 하였고, 행궁(行宮)에 나아갈 때에는 사리 분신(舍利分身)6498) 이 있었고 신천(神泉)이 솟아올랐으니, 이는 실로 예천(醴泉)이다.
세조 32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 3월 25일(무인 ) 2번째기사
홍윤성에게 겸예 조 판서의 직을 제수하다
근정문(勤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받고, 들어와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종친(宗親)·재상(宰相)·제장(諸將)·승지(承旨)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미 멀리 순행하고 돌아왔으니, 경(卿) 등은 차례로 술을 올리라.”
하고, 이어 서로 조용하게 담론(談論)하였다.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을 겸 판예조사(兼判禮曹事)로 삼았다.
ㅇ 금계필담(錦溪筆談) 원문
[ 本帖最后由 greencrystal 于 2011-7-19 18:20 编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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