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查了一下韓網,得知은고中文寫作恩古
呃,還有其他人名和地名的中文寫法
의자왕(義慈王)은 백제 30대 임금인 무왕의 원자(元子)로 출생하였다. 그의 출생 시기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맏아들이라는 보장이 없는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이 615년에 출생하였으므로, 가장 이르게 잡아도 595년 경에 출생한 게 된다. 문제는 의자왕의 어머니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와 관련한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은 즉위 전 서동(薯童), 곧 맏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인물로서, 마[薯]를 캐고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던 불우한 왕족이었다. 그는 적국인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를 모략으로써 유인하여 데려온 대단한 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이후 서동은 인심을 얻어 즉위했다. 그의 왕비가 선화공주인 것이다.
그러면 무왕의 원자인 의자왕은, 무왕과 선화공주 사이의 소생이었을까? 다른 반대되는 사료가 없는 이상 일단은 믿어야만 될 것 같다. 그러나 의자왕의 어머니가 신라 왕녀였다는 사실은, 신라와의 관계가 험악하였던 대외정세와 귀족들을 견제해야 하는 상황에서 대단히 불리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이 분명하다.
역대 왕들과 마찬가지로 무왕 또한 여러 명의 부인(부인은 삼국시대 왕비에 대한 호칭임)을 거느렸을 상황에서, 의자왕의 모계는 그의 정치적 진출에 있어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신라와 국가의 국운을 결정하는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선화왕비의 소생인 의자 왕자가 정적들로부터 공격의 표적이 되었음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그러한 의자 왕자는 실제 정치적으로 곤궁한 위치에 있었다. 이는 그가 태자로 책봉된 시기가 무왕 33년(632)인 데서도 유추된다. 632년이면 그의 나이가 40세 가까이 되는 것으로 짐작되는데, 책봉 시기가 매우 늦은 것이다. 이는 의자 왕자의 태자 책봉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반증해 준다. 이와 관련해 돌궐에서는 혼인동맹이 존재하였지만 외국 합한[可汗]의 여자와 혼인하여 낳은 아들은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고 한다.
의자 왕자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가능성을 제기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태자로 책봉되고 즉위할 수 있었던 배경은,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엎드려서 시기를 기다리는 인내심과 적을 만들지 않는 노련한 처신 때문이었다. 그가 부모를 효(孝)로써 섬기고 형제들과는 우애가 있어 해동증자(海東曾子)로 칭송 받았음은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 같다. 증자는 공자의 제자로서 춘추시대 노국(魯國) 사람이었는데, 하루에 세 번 성찰하면서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하였던 인물이다. 특히 그가 형제들간에 우애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이복형제(異腹兄弟)들과의 관계가 매끄러웠음을 뜻한다. 의롭고 자애롭다는 뜻을 담고 있는 ‘의자(義慈)’라는 이름 또한 이와 관련해 유의해야만 될 것 같다. 여하간 그가 해동증자라는 칭송을 받았음은, 당시 귀족사회에서 좋은 평판을 광범위하게 얻었음을 뜻하는 동시에, 이러한 요인이 즉위 배경이 되었다고 보겠다.
의자 왕자는 무려 42년이라는 장구한 기간 동안 통치를 한 무왕이 사망한 후 즉위하였다. 해동증자라는 평에 걸맞게끔 의자왕은 유교 정치사상을 강조하여 취약한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게다가 의자왕은 즉위 초 국내를 시찰하고 죄수들을 재심사하여 사형수 외에는 모두 방면(放免)하여 민심 수습에 적극 나섰다. 그는 결단코 밀전(密殿)의 통치자로 머물지는 않았다. 통치의 폭을 확대시키기 위해 궁성을 박차고 나왔다. 이는 시대적 요구에 대한 부응이요, 그의 성격과도 딱 부합되기도 한다.
『 삼국사기』에는 그의 성격을 “용감하고 담대하며 결단력이 있었다”고 하였다.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의 묘지(墓誌)에서도 의자왕을 일컬어 “과단성 있고 침착하고 사려 깊어서 그 명성이 홀로 높았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의 품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를 든다면 결단력이 아닐까 생각된다. 결단을 내려야 하는 중요한 순간 순간에 우물쭈물하다 실기하는 지도자들을 많이 보아오지 않았던가? 또 험난한 국정을 이끌어 가는 데에는 소신을 갖고 일을 추진하는 배짱도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의자왕은 군주로서, 그것도 난세의 임금으로서 당초 훌륭한 자질을 구비하고 있었다.
수 세기에 걸친 동란기(動亂期)에 요청되는 군주상은 어떤 유형일까? 전장의 선두에서 작전을 지휘하며 전선을 누빌 수 있는 장군과 같은 군주였다. 그러고 보면 걸출한 임금이었던 성왕이 전장에서 숨진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의자왕 또한 군 최고 그것도 야전사령관으로서의 혁혁한 위상을 몸소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지금의 88고속도로 주변에 소재한 신라의 40여 개 성을 일거에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그가 즉위와 더불어 외가격(外家格)인 신라에 대한 공격을 몸소 단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를 옥죄고 있던 외가 컴플렉스에서 벗어나 백제 왕자(王者)로서의 역량과 정치적 입장을 검증받는 기회로 삼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특히 그는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어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에 소재한 신라의 옛 가야지역에 대한 통치 거점인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대야성의 성주인 품석(品釋)과 그 처인 고타소랑이 항복하였다. 이들은 다름 아닌 당시 신라의 실권자인 김춘추의 사위와 딸인 것이다. 윤충은 이들의 목을 가차없이 베어 수도인 사비성(충청남도 부여)으로 보내는 한편, 남녀 1천 여 명을 사로잡아 나라의 서쪽 지방으로 분산 · 거주시켰다. 의자왕은 윤충에게 말 20필과 곡식 1천 석을 내려주는 파격적인 포상(褒賞)을 단행할 정도였다.
의자왕은 내부적으로는 인덕정치(仁德政治)로서, 외부적으로는 전승(戰勝)을 통하여, 그의 정치적 위상을 높였다. 동시에 권력 기반을 확대시켜 나갔다. 의자왕은 외교에도 탁월한 감각을 지녔던 바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 재위 12년까지는 당나라와는 대체적으로 공존을 모색하고 왜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고구려와는 손을 잡고 신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가하였다. 누대에 걸친 원한에 연연하지 않고 동맹자로서 고구려를 맞아들이는 탁월한 현실 감각을 보여주었다. 의자왕은 군사적인 압박을 강화하는 동시에 외교적인 방법으로써도 신라를 고립시켜 나가고자 했다. 이러한 선상에서 당항성(黨項城) 공략이 추진되었다.
당항성은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에 소재한 신라와 당나라를 해로(海路)로 연결시켜주는 요충지였다. 의자왕은 재위 3년(643) 11월에 당항성을 공격하여 신라와 당나라간의 연결 통로를 차단시키려고 하였다. 그러자 신라측에서 기겁을 하여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므로, 의자왕은 이내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는 그가 상당히 신축성 있게 대외정책을 운용하였음을 뜻한다. 대외정세에 대한 식견이 깊었음을 뜻한다. 신라의 목을 죄는 것이 오히려 신라와 당나라간의 결속을 다져주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고 판단하여 포위를 풀었던 것이다. 의자왕은 이듬 해 정월에는 당나라에 즉시 사신을 보내었다. 당나라와의 관계에 틈을 보이지 않도록 만전을 기한 것이다.
의자왕의 군사적 재능은 실로 탁월하였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면서 신라로부터 군사를 징발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신라를 습격했다. 허(虛)를 찔러 7개 성을 빼앗았다. 재위 15년(655)에는 고구려ㆍ말갈과 연합하여 신라 북쪽 변경의 30여 개 성을 점령하였다. 그는 국제관계의 흐름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지녔다. 그에 맞추어 전략을 수립하였고 즉각 실행에 옮겼다.
왕권을 공고하게 다진 의자왕은, 오랜 동안 은인자중하며 비수처럼 품어 왔던 과제, 바로 내부체제 정비를 단행하였다. 혁명적인 정변이었다. 이와 관련해『일본서기』기록 가운데 황극(皇極) 원년(642) 조의 정변 기사를 제명(齊明) 원년(655) 조에 배치하는 게 타당하다. 그렇다면 의자왕은 재위 15년에, 선왕(先王)인 무왕의 왕비이자 실권자였던 계모가 세상을 뜬 것을 계기로 정변을 단행하여 대대적인 숙청을 전개하였다. 왕족뿐 아니라 계모의 친정세력을 비롯하여 명망가적(名望家的) 식자층(識者層)에도 그것이 미쳤다. 이들을 섬으로 추방시켰던 것이다. 그에 따라 의자왕은 귀족세력의 견제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권력 독주가 가능해졌다.
국왕을 견제할 수 있는 귀족 공동체의 결집력을 와해시킨 의자왕은 이내 매너리즘에 빠졌다. 의자왕은 즉위 전부터 재위 15년까지의 오랜 기간 동안 자못 긴장된 생활을 해 왔었다. 그러나 이제 정적들을 제거함에 따라 정치적 긴장에서 해방되었다. 해동증자라는 칭송이 더 이상 의자왕을 구속할 수 없었다. 의자왕은 너무나 지쳐 있었고, 눈치 볼 사람도 없어졌다. 환갑을 넘긴 의자왕의 가슴 속에 갇혀 있던 생동적 에네르기는 음란과 향락의 방향으로 뿜어져 나왔다.
의자왕의 음황과 궁중 부패는 여러 사료에서 확인된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궁인과 더불어 음황 탐락하여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삼국유사』에서 “사비하() 양쪽 언덕이 그림 병풍처럼 되어 있어 백제왕이 매번 놀면서 잔치하고 노래와 춤을 추었으므로 지금도 대왕포(大王浦)라고 일컫는다”라고 한 곳이 그러한 장소였다. 또『신증동국여지승람』은 진현(恩津縣) 조에 의하면 “산에 큰 돌이 편편하고 널찍하여 시진(市津)의 물을 굽어 보고 있으니 이를 황화대(皇華臺)라 부르며,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백제 의자왕이 그 위에서 잔치하고 놀았다고 한다”라는 기사도 보인다.
의자왕의 이러한 사치와 탐락은 백제 멸망의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잡을 정도로 극심하였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해 “덕행은 언제나 곤궁 속에서 이루어지고, 몸을 망치는 것은 대부분 뜻을 얻었을 때이다”라고 한『용언(庸言)』의 말이 실감나게 와 닿는 것이다.
게다가 의자왕은 서자(庶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각각 식읍(食邑)까지 내려 주었다. 6좌평제에서 무려 41명의 좌평이 추가되었다. 이는 명예직으로서의 성격이 다분하다. 이 사실은 백제 중앙관직체계 뿐 아니라 국가조직 전반에 걸친 모순의 야기와 동요를 점치게 하는 것이다.
참고로 의자왕하면 흔히 대명사처럼 따라 붙는 것이 ‘삼천궁녀’ 이야기이지만 언급할 가치도 없는 말이다. 다만 의자왕의 서자 숫자만 41명이었던 점을 생각할 때, 실제 그의 자녀수는 이보다 더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따라서 의자왕이 왕비 외에 많은 여인들을 거느렸음이 분명하나 그들 슬하의 아들들에게 공히 좌평을 제수하였음은, 여인들의 소속 가문을 종적으로 위계화시키지 못하였음을 시사한다. 이는 의자왕이 그것을 시도할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기 보다는 여인을 매개로 한 권신(權臣)들의 정치 개입이 심화되었고, 권신들간에는 일종의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특정 귀족세력의 권력독주를 용인하지 않기 위한 의자왕의 견제 시책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여하간 의자왕 17년에 41명의 서자, 또 어느 정도 장성한 연령층의 서자였으리라는 점을 생각할 때, 다수의 여인들을 거느렸음을 알 수 있다.
큰 범죄에는 반드시 여자가 개입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국가의 멸망에도 어김없이 여자 이야기가 회자되곤 한다. 백제의 경우도 예외가 되지 않는 것 같다. 고구려 승려 도현(道顯)이 지은『일본세기(日本世記)』에 의하면
...혹은 말하기를 백제는 스스로 망하였다. 군대부인(君大夫人) 요녀(妖女)가 무도하여 국병(國柄)을 제 마음대로 빼앗아 현량(賢良)을 주살한 까닭에 이 화(禍)를 불렀다...(『일본서기』제명 6년 7월 조)
라고 하였다. 부여 정림사지 5층탑신에 새겨진 명문에도 “항차 밖으로는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는 요부(妖婦)를 믿어 형벌이 미치는 것은 오직 충량(忠良)에게 있으며 총애와 신임이 더해지는 것은 반드시 먼저 아첨꾼이었다”라고 전한다. 요녀로 전하는 은고(恩古)라는 여인이 기록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의자왕은 재위 4년에 부여융을 태자로 책봉하여 후계자 문제를 일찍 매듭지었다.
그런데 의자왕은 은고 세력의 지원을 얻어 정변에 성공했다. 그럼에 따라 태자위(太子位)는 부여융에서 은고의 아들인 부여효로 교체된 것으로 보겠다. 그와 동시에 은고가 권력을 거머쥐었다. 은고는 노쇠한 의자왕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은 틈을 타고 전횡을 일삼았던 것이다. 게다가 백제 조정 깊숙한 곳에는 신라의 첩자가 박혀 있었다. 좌평 임자(任子)였다. 그를 통해 김유신은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훤하게 백제의 내정을 꿰뚫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백제의 민심이 흉흉했음을 암시하는 재변이잇따라 발생하였다. 주목되는 사건은 충청남도 보령군 성주리에 소재한 오합사(烏合寺)에서 일어났다. 신라말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성주산파의 본산인 성주사(聖住寺) 터에는 본래 백제 법왕(法王)이 창건한 오합사가 있었다.
법왕이 태자로 있던 599년에 전승(戰勝)한 원혼(寃魂)들이 불계(佛界)에 오르기를 기원하기 위한 목적의 호국도량으로서 창건한 비중 큰 사찰이다. 그에 걸맞게『삼국사기』와『삼국유사』그리고『일본서기』에 모두 적혀 있는데, 모두 한 가지 전조(前兆) 관련 기사이다. 즉, 적색 말이 북악(北岳)의 오합사에 들어와 울면서 불당을 돌기 수 일만에 죽었다고 한다. 혹은 오합사에 커다란 적색 말이 나타나 주야로 여섯 차례나 절을 돌았다고도 했다. 백제가 신라를 공벌하고 돌아 왔을 때 말이 오합사의 금당을 돌며 쉬지 않았다고 하였다. 말할 나위 없이 백제의 멸망을 암시해주는 조짐이었다.
서기 660년의 뜨거운 한 여름, 신라와 당나라 동맹군은 백제 공격에 나섰다.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은 13만 대병을 이끌고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인천 앞 바다에 소재한 덕물도(德勿島: 덕적도)에 정박하였다. 동시에 신라측에서는 김유신이 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백제 동부전선을 돌파하고 있었다.
백제 조정에서는 방어대책 수립에 나섰지만 의견 통일이 되지 않았다. 좌평 의직(義直)은 당군이 육지에 상륙했을 때를 기다려 당나라 군대부터 치자고 한 반면, 달솔 상영(常永) 등은 신라군을 먼저 꺾자고 주장하여 논의가 팽팽히 맞섰다.
과단성 있기로 정평이 난 의자왕이었지만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의자왕은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전라남도 장흥)에 귀양 가 있는 좌평 흥수(興首)에게 사자를 보내어 물어 보았다. 흥수는 백강과 탄현(炭峴)을 방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 제안의 채택 여부를 둘러싸고 백제 조정이 격론을 벌이는 가운데 당나라와 신라 군대는 빠른 속도로 이곳을 모두 돌파하고 있었다. 또 신라군은 황산전투에서 계백 장군의 결사대를 무찔렀고, 당군 또한 금강 하구에 상륙하여 결사 항전하는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도성에 이르렀다. 나당연합군의 진격을 막는 백제군의 숫자까지 합친다면 20만 안팎의 대병력이 충청남도 부여에서 격전을 치렀다.
동란의 시기인 삼국시대에는 수 세기에 걸쳐 많은 전쟁이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대병력이 한 장소에 집결하여 격돌하는 회전(會戰)은 초유의 일이었다.『일본서기』에 의하면
금년 7월 10일 대당(大唐)의 소정방이 수군을 거느리고, 미자진(尾資津)에 집결하였다. 신라왕 춘추지(春秋智)는 병마를 거느리고, 노수리산(怒受利山)에 모였다. 백제를 협격하여 서로 싸운지 3일만에 우리 왕성(王城)이 함락되었다. 같은 달 13일 비로소 왕성이 격파되었다. 노수리산(黃山)은 백제의 동쪽 국경이었다
라고 하여 긴박한 상황의 흐름을 요령있게 적어 놓았다.
의자왕은 태자 효(孝)와 함께 북방의 웅진성으로 몸을 빼었다.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사비성을 굳게 지켰으나 결국 항복하였다. 대적하던 백제는 7월 13일 사비도성을 함락 당했고, 18일에는 웅진성으로 탈출했던 의자왕이 항복하였다. 그럼에 따라 지방의 장관들도 일제히 손을 들었다. 의자왕의 항복은 곧바로 나라의 멸망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당나라 군대의 철수를 전제로 한 조건부 항복이었다. 그랬기에 신라와 당나라 군대에 힘차게 대적하던 백제 군대는 일제히 항쟁을 멈추었던 것이다. 그런데 약속과는 달리 당나라 군대는 늙은 의자왕을 가두고 군사를 놓아 닥치는 대로 노략질을 자행하였다. 분명히 이것은 약속과 달랐다.
8월 2일에는 신라와 당의 전승 축하연이 사비도성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신라 무열왕과 소정방을 비롯한 장군들은 당상(堂上)에 앉았다. 의자왕과 부여융은 당하에 앉히었다.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잔을 치게 하였다. 억장이 무너질 정도로 기막힌 장면이 백제인들의 목전에 펼쳐졌던 것이다. 백제의 옛 신하들은 목이 메어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항복했을 때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은 마상의 김법민(후일의 문무왕)에게 침세례까지 받지 않았던가? 패전의 참혹한 현실은 백제 주민들에게 울분적 공감대를 조성시켜 주었다.
소정방은 2개월이 채 안된 9월 3일에 회군하면서 의자왕을 비롯하여 왕족과 여타 귀족 그리고 주민들을 당의 수도인 장안으로 압송하였다.당군에게 압송되어 떠나가는 의자왕(유왕산)
망국의 임금 의자왕은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심경도 복잡하였다. 나이도 환갑을 훌쩍 넘긴 고령이었다. 신라와 당나라 군대에 항복한 이래 갖은 수모를 겪었고, 거친 파고를 헤치고 당나라로 압송되었다. 의자왕은 울울한 심회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결국 홧병으로 인해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이국 땅에서 세상을 건너갔다. 의자왕이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온지 불과 며칠만이었다.
당나라 조정은 의자왕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으로 추증(追贈: 죽은 뒤에 나라에서 그의 관위를 높여 주는 것)하였고 옛 신하들이 찾아와 곡(哭)하는 것을 허용해 주었다. 의자왕의 묘소는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마지막 군주였던 손호(孫皓)와 남북조시대 진(陳)나라의 마지막 군주였던 진숙보(陳叔寶)의 묘소 왼편에 마련되었다. 진숙보의 묘소는 중국 하남성 낙양의 북망산에 조영되었으니, 의자왕의 묘소 역시 이곳에 소재했음을 알 수 있다. 모두 주색에 빠져 멸망한 나라의 마지막 군주들끼리 묘소가 나란히 조영되었던 것이다. 의자왕의 묘소에는 아울러 비석까지 세워졌다.
그러나 비석이 훼실되는 바람에 의자왕의 묘소는 망각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홍위병들이 북망산 일대의 능묘들을 갈아 엎어버리는 통에 그 유택을 찾을 길은 영영 없어졌다. 다만 의자왕의 혼토(魂土)라도 조국 땅에 모셔야 한다는 취지에서 2000년 9월 30일 부여 능산리 백제 왕릉군 곁에 새로 유택을 조영하여 그 넋을 달래고 있다. 아울러 지나가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면서 숙연하고도 비감한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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