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卞永姝导演专访
存个档,给偶们最“帅”的导演。
| 지난 12일 서울 홍대 앞 카페에서 만난 변영주 감독은 외로워 보였지만 외로워하지 않았다. 감독은 자신에게 가혹할 만큼 작품에 몰입하되, 완성된 작품을 두고는 무대 위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섬세한 뚝심’ 변 감독의 두번째 영화인생은 장르영화란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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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변영주 영화감독변영주 감독은 참 다재다능한 사람입니다. 제주도의 관광 요정에서 일하는 성매매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린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1993)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위안부 할머니들과 거의 8년을 함께 생활하며 제작한 <낮은 목소리>(1995, 1997, 1999) 연작 다큐멘터리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극영화로 전환한 뒤에는 전업주부의 은밀한 사랑을 매혹적으로 묘사한 <밀애>(2002)와 입시를 앞둔 청소년들의 고민과 방황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 <발레교습소>(2004)를 만들었고, 최근에는 사회경제적 약자로 극한에 몰린 여성의 극단적 선택을 그린 <화차>(2012)로 흥행 감독의 대열에 올랐습니다. <시네마 천국>을 비롯한 여러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해설자와 패널로 활약했고, 진보정당 지지자로 각종 집회에 빠짐없이 나타나는 운동가이자 사회자로도 유명합니다. 지난 20년간 그가 벌여온 다양한 활동의 중심에는 쫓겨나고 밀려난 ‘성문 밖 사람들’에 대한 일관된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든 캐릭터가 바로 <화차>의 경선(김민희)입니다. <밀애>와 <발레교습소>를 좋아했던 저는, 그와 일면식 없는 사이면서도, <화차>의 흥행 소식을 듣고 마치 가까운 친구가 대박을 낸 것처럼 기뻤습니다. 총선이 끝난 다음날 홍대 근처의 어두운 카페에서 순전한 팬의 마음으로 변영주를 만났습니다. -트위터를 보니까 어제(선거일)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더군요. “심상정 때문에 노심초사하면서 마셨고, 당선됐다는 얘기 듣고는 즐거워져서 더 마셨죠.” -진보신당의 낮은 득표에 실망하지는 않으셨나요? “전국 24만명의 지지를 받았는데, 거기부터 출발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그 24만명은 비정규직이나 해고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잖아요. 쌍용차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 모이라고 할 때 최대한 24만명은 모일 수 있고, 스타 정치인 하나 없는 상황에서 청소노동자 김순자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면 충분히 즐거운 일 아닌가요? 저는 성공하지 못하는 것에 익숙해요.(웃음) 진보신당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쌍용차, 강정, 재능교육, 한일병원 같은 문제라고 생각하고요.” -왜 실패했는지는 검토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누구 잘못이겠어요. 우리 잘못이지.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 앞줄에 나와 깃발을 흔들고 있는 사람들, 바로 우리 같은 선거의 춤꾼들 책임이죠. 우리 춤이 덜 섹시했거나 신기(神氣)를 덜 받았거나 그런 거겠죠. 젊은이들에게 ‘너는 왜 대한민국 사회에 관심 없니?’ 하고 책임을 묻는 건, 편의점 알바한테 시급도 제대로 안 주면서 건방 떠는 편의점 주인과 다를 게 없어요.” 학생운동 딸을 경찰에 신고한 아버지
-영화 <화차>를 보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선에 대한 감독의 애정이 느껴집니다. 그래도 살인은 살인 아닌가요? “영화를 만든 제 입장은 경선에 대해 훨씬 냉정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관객들이 그동안 여성 배우의 열연에 굶주렸던 것 같아요. 문호(이선균)의 애틋한 시선과는 독립적으로 김민희의 열연이 관객과 예상치 못한 긍정적인 화학작용을 만들어낸 거죠.” -시나리오가 무려 20고를 거쳤다고 하더군요. 완벽주의자이신 거죠? “완벽주의자는 아니고요. 3년쯤 걸렸는데, 처음 9고까지는 매번 완전히 다른 줄거리를 썼어요. 엔딩까지 쓰고, 함정에 다 빠져봐야 알 수 있는 게 있더라고요. ‘형사를 주인공으로 넣어보니 엔딩은 이것밖에 안 나오는구나’ 하고요. 겨울에 시작했는데 다 쓰고 나면 이미 벚꽃이 진 때도 있었어요. 그러고도 모두 버려야 할 때는 침대 붙잡고 엉엉 울기도 했죠. 그래도 영화 찍는 도중에 잘못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요. 돈이 안 드니까요.”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난 변영주는 어려서부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옆에 끼고 살았을 정도로 역사와 문학을 좋아했습니다. 의사였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암흑가의 세 사람>, <아라비아의 로렌스> 등을 보러 다니며 영화의 맛을 느꼈고, <스타워즈>처럼 서사가 살아 있는 영화들을 좋아했습니다. -의사 아버지 밑에서 생활의 어려움은 없었겠네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죠? “학교 다니면서 등록금 걱정은 안했어요. 영화 일을 시작하고 나서야 ‘버스비도 없다는 게 이런 거구나’ 처음 알았고 그때부터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죠. <낮은 목소리>를 찍을 때 아버지는 저에게 말씀도 안 하시고 ‘나눔의 집’에 무료 진료를 다니셨어요. 조선일보만 보시면서도, ‘윤리는 보수의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분이죠. 선행도 오직 빨갱이들이 득세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하는 분이에요.(웃음) 전형적인 자유주의자인데, 노동절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교화소에 끌려갔다가 월남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하셨고, 나중에 검정고시로 의대에 들어가셨죠. 제가 학생운동 할 때는 심지어 노량진경찰서에 딸을 따로 관리해 달라고 신고도 하고, 빨갱이 책처럼 보이는 건 모두 불태우실 정도로 관계가 안 좋았어요. 나중에 박완서의 <그 남자의 집>을 읽고 ‘저 남자들의 청춘을 빼앗아간 것은 전쟁인데, 저 남자들은 전쟁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무서워하는구나’ 깨닫고 아버지를 좀 이해하게 됐죠. 제가 만난 몇 안 되는 괜찮은 보수주의자예요.”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다가 영화과 대학원에 들어가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하셨죠? “대학 시절은 붙잡히는 게 무서워서 피하고 도망 다닌 기억뿐이에요. 저 대신 잡혀가 고생한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있죠. 그러나 정작 세상에 눈을 뜬 건 대학 때가 아니라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전열>(1991)에 참여하면서부터였어요. 그분들이 저를 집까지 불러, 집에서 담근 시큼한 포도주를 따라주면서 인생 얘기를 들려준 게 저에게는 최고의 공부였죠. 나중에 그 어른들 중 몇몇이 뉴라이트가 된 걸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과 <낮은 목소리> 연작은 시대를 뛰어넘어 억압받는 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김동원 감독의 권유로 기생관광 다큐를 만들러 제주도에 내려갔어요. 그때는 제주도의 특급호텔 지하마다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한 요정이 있었죠. 거기 일하는 언니 한 명을 소개받아 이야기의 중심으로 삼았는데, 알고 보니 그 언니의 어머니가 위안부셨어요. 위안부 어머니의 수술비를 마련하려고 공장을 다니다가 성매매 여성이 된 거였죠. 아, 이게 정말 여성의 운명인가 생각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이 계시던 ‘나눔의 집’까지 찾아가게 됐어요. 처음에는 할머니들이 ‘넌 또 우리를 어떻게 이용하려는 거냐?’며 쫓아내셨죠. 그러면서 할머니들의 과거가 아니라 할머니들이 세상에 드러난 순간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가 궁금해졌어요. 다음날부터 매일 ‘나눔의 집’으로 출근해서 온종일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었어요. 할머니들은 저를 계속 무시하셨죠. 6개월 지나니 말씀을 시작하시더군요. 그때 결심했어요, 할머니들이 스스로 얘기를 꺼내기 전에는 위안소에 대해서, 과거에 대해서 내가 먼저 묻지 않겠다고. 결국 할머니 한 분이 낮술 자시고 화투 치다가 툭툭 이야기를 던지신 게 <낮은 목소리>의 출발이 됐죠. 영화 나오고 나서는 할머니들이 관객들 반응을 보고 정말 좋아하셨어요.”
제주서 만난 성매매 여성
그녀의 어머니가 위안부
8년에 걸친 ‘낮은 목소리’는
그렇게 세상으로 나왔다 멘토라는 말이 우스워요
그저 누군가 함정에 빠졌다면
그가 지쳐 돌아왔을 때
따뜻한 코코아나 타줘야죠 <낮은 목소리> 찍다 가슴에 대못 박힌 사연
-아픔을 안고 사는 할머니들과 8년 가까이 함께 지내며 영화를 찍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낮은 목소리 2>가 제일 힘들었어요. 강덕경 할머니가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3개월밖에 못 산다고, 오래 기억될 수 있는 영화를 찍어 달라고 부탁하셔서 시작한 다큐거든요. 사실 <낮은 목소리>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제작진끼리 담당 할머니를 나누고 있었어요. 할머니들끼리 싸우고 문 걸어 잠그시면 촬영이 안 되니까, 우리가 각자 담당한 할머니 얘기를 듣고 우리끼리 싸우면서 해법을 찾아 화해를 시켜드리곤 했거든요. 강덕경 할머니가 제 담당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저랑 제일 친했어요. 제가 살아온 이야기도 다 했고, 할머니도 저한테 별별 이야기를 다 하셨죠. 저한테는 친엄마 같고, 친할머니 같고, 때로는 자매나 친구 같은 분이었어요. 그런데 이분이 3개월을 넘어 1년 반을 더 사셨거든요. 딱 1년이 지나니까 촬영할 돈은 떨어졌고, 두 달에 한 번꼴로 할머니는 응급실에 실려 가시는데, 언젠가부터 제가 ‘이번에는 영화를 끝낼 수 있으려나?’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조감독 녀석 하나는 간호사한테 ‘이번에 할머니 돌아가시나요?’라고 묻고는 자기가 더 놀라서 한쪽 구석에서 꺼이꺼이 울고, 저는 죄책감과 트라우마 때문에 촬영 끝나면 밖에 나가 술만 마셨어요. 그러다가 제가 도쿄에 나타난 여자귀신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썼어요. 강덕경 할머니와 비슷한 얘기를 간직한 귀신이었는데 그걸로 로테르담영화제 시네마트에 초청을 받았죠. ‘야, 신난다, 가서 쉬고 와야겠다’ 생각하고 출국했는데, 바로 다음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그땐 정말 화가 나더군요. 제가 잠깐 자리를 비웠다고 ‘어, 니가 날 놔두고 한국 떴어?’ 하면서 ‘못된 할망구’가 복수하고 벌을 준다고 생각했거든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엄청 울었어요. 할머니가 ‘너는 나를 평생 못 잊어’ 하면서 대못을 박은 것 같았어요.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때였죠.” -그 후에도 <낮은 목소리 3-숨결>을 계속 찍으셨죠? “너무 힘들어서 <낮은 목소리 2>로 접으려고 했는데, 이용수 할머니하고 일본 피스보트(Peace Boat)의 초청을 받아 배 타고 베트남에 가게 됐어요. 한국군이 베트남 양민 학살한 지역에 가는 거였는데, 거기 도착하기 전부터 할머니가 ‘영주야, 나한테 잘못을 저지른 일본애들이 왜 한국 군인이 잘못한 데로 나를 데려가는 거냐, 음모가 있는 것 아니냐?’며 불안해하셨어요. 베트남에서 한국 군인이 저지른 이야기까지 듣고 나서는 충격이 더 크셨죠. 그러다가 한쪽 다리를 잃은 베트남 생존자 할머니의 증언을 듣던 이용수 할머니가 손을 번쩍 드셨어요. 뭔 소리를 하실지 몰랐죠. 그런데 ‘나는 일본군에게 피해를 입었다. 오늘 당신 얘기를 들으니 우리 여성에게 왜들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당신도 일주일에 한번씩 베트남 한국대사관에 가서 배상을 요구해라. 수요일은 한국에서 우리가 하니까 당신은 다른 요일에 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난 정말 그런 연대를 본 적이 없어요. 그 모습에 홀딱 반해서 이용수 할머니를 인터뷰어로 <낮은 목소리 3-숨결>을 찍었죠.” -그러고 나서 극영화로 전환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숨결>을 찍은 다음에 백내장에 걸렸어요. 백내장은 주로 할머니들이 걸리는 병이잖아요. 그래서 백내장도 전염병인가 생각했죠.(웃음) 양쪽 눈 수술을 받았는데 더는 카메라 뷰파인더를 볼 수가 없었어요.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직접 찍던 시절이라 다른 길을 찾아야 했죠. 할머니들 중 한 분의 위안부 경험이 거짓이었다는 논란을 겪으면서, 내가 아직 진실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어른이 아니구나 생각한 것도 전환의 계기가 됐죠.” -첫 극영화가 여성의 욕망을 다룬 노출수위 높은 영화였다는 게 의외입니다. “독립영화 하면서 사람들에게 받았던 지지를 가지고 충무로에 가는 건 치사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위안부 이야기처럼 정치적이거나 올바른 게 아니라 아주 사적이고 여성적인 영화를 만들려고 했죠.”
삼겹살집 청년의 ‘젓가락 트로피’에 그만…
-<밀애>와 <발레교습소>의 흥행에 연달아 실패하고는 많이 힘들었죠? “빈둥거리다 밤 12시에 텔레비전을 켰는데 <밀애>를 하고 있으면, 채널도 돌리지 못하고 다시 보면서 괴롭죠. 부끄러워서요. 내가 잘못한 걸 끊임없이 확인받는 거니까요. <발레교습소>는 훨씬 더 매혹적이고 경쾌하게 만들 수 있었는데 제가 게을러터지고 시건방졌어요. 영화 만들며 나를 완전히 발화시키고 소진시키지를 않았던 거죠. 하지만 <발레교습소> 망하고 안식년처럼 쉬면서는 정말 좋았어요. 영화 보고 책 보고 음악 듣는 동안 잘 마른 장작을 하나씩 마련하는 느낌이었어요. 한번 불 댕기면 확 타오를 수 있는 그런 장작을.” -기억에 남는 연애가 있다면? “상대방이 똑똑한 사람이어서 잘 보이려고 열심히 공부했던 적이 있어요.(웃음) 연애는 실패했지만 덕분에 제가 현명한 어른이 되었죠. 저는 철저하게 혼자인 걸 즐기는 편이에요. 동면기 들어가면 아무도 안 만나요. 한 달 동안 사람과 대화하지 않은 적도 있어요. 거울 보고 혼잣말을 하며 제 멘탈을 키우죠. 전 정말 멘탈이 ‘갑’입니다.(웃음) 특히 촬영할 때는 연애든 뭐든 다른 일을 전혀 못해요. <화차> 만들 때는 <시네마 천국>도 그만두고, 아무리 힘들어도 밖에서 위로를 찾으려 하지 않고 영화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어요. 그러니까 풀리는 게 있더라고요.” -배우들은 변 감독님을 배려할 줄 아는, 여리고, 똑똑한 분이라고 하더군요. “원래는 제가 위악적이고 공격적인 애였어요.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모르는 게 탄로날까봐 늘 두려웠죠. 그런데 40살이 되던 해 인간적으로 저에게 너무 큰 실망을 안겨준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자기가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지 얘기하며 자기연민에 빠져 변명을 늘어놓는데 그게 딱 제 모습이더라고요. 확 부끄러웠고, 그때부터 되게 많이 달라졌어요. 미안하다고 빨리 말할 수 있게 되었고, 다시 찍자고 부탁할 수 있게 됐죠. 부족한 재능은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채우면 되고, 감독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건 듣는 귀라는 생각도 하게 됐어요.” -과거의 감독님처럼 위악적이고 공격적인 후배들이 주변에 많지 않나요? “몇 번 당하면 지들도 알게 되겠죠.(웃음) 빠져야 하는 함정이라면 빠지는 게 좋아요. 그래서 멘토라는 말이 재수 없다고 생각해요. 멘토는 무슨.(웃음) 우리가 할 일은 함정에 빠졌다 지쳐 돌아온 친구들에게 따뜻한 코코아나 타 주는 거예요.” -영화 만들면서 행복했던 순간이 있다면? “<화차> 개봉날 뒤풀이를 하는데, 삼겹살집에서 일하는 청년 하나가 나무젓가락을 부러뜨려 칸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는 트로피 모양의 깃발을 만들어 주더군요. ‘아침에 영화 봤는데 너무 좋았어요’ 하면서요. 미치게 고마웠어요. 그날 죽기 직전까지 술을 마셨는데도, 아침에 일어나니 제가 그 깃발을 여전히 손에 쥐고 있더군요.” 낮에 만난 변영주는 함정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듬직하고 차분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밤 김상봉 선생의 출판기념모임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그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참석자를 소개하던 사회자 변영주는 테이블을 돌며 분위기를 띄우다가 감정이 오르면 동료들과 어깨를 겯고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넘쳐나는 그의 정열을 보며 ‘한밤중에 술 마시고 인터뷰할걸’ 하는 후회가 쓰나미처럼 밀려왔습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30320.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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