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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黃眞伊)
간략정보
시대 조선
생몰년 미상
활동분야 명기(名妓)
다른 이름 황진(黃眞)/진랑(眞娘)/명월(明月)
황진이(黃眞伊)에 대하여
황진이(黃眞伊)
생몰년 미상. 조선시대의 명기(名妓). 본명은 진(眞),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개성출신. 확실한 생존연대는 미상이나, 중종 때 사람이며 비교적 단명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전기에 대하여 상고할 수 있는 직접사료는 없으며, 간접사료인 야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이 계통의 자료는 비교적 많은 반면에 각양각색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신비화시킨 흔적이 많아서 그 허실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
출생에 관하여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전하는데,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숫자적으로는 우세하지만 기생의 신분이라는 점에서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설이 오히려 유력시되고 있다.
기생이 된 동기에 대하여도 15세경 이웃 총각이 혼자 연모하다 병으로 죽자 서둘러서 기계(妓界)에 투신하였다고 하나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다.
또한, 미모와 가창뿐만 아니라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으며, 당대의 석학 서경덕(徐敬德)을 사숙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 당시(唐詩)를 정공(精工)하였다고 한다.
그러한만큼 자존심도 강하여 당시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기도 하였고,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한, 박연폭포(朴淵瀑布)·서경덕·황진이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가 지은 한시에는 〈박연 朴淵〉·〈영반월 詠半月〉·〈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여소양곡 與蘇陽谷〉 등이 전하고 있으며, 시조 작품으로는 6수가 전한다. 이 중 〈청산리 벽계수야〉·〈동짓달 기나긴 밤을〉·〈내언제 신이없어〉·〈산은 옛산이로되〉·〈어져 내일이여〉의 5수는 진본(珍本)《청구영언》과 《해동가요》의 각 이본들을 비롯하여 후대의 많은 시조집에 전하고 있다.
〈청산은 내뜻이요〉는 황진이의 작품이라 하고 있으나 《근화악부 槿花樂府》와 《대동풍아 大東風雅》의 두 가집에만 전하며, 작가도 《근화악부》에는 무명씨로 되어 있고, 《대동풍아》에서만 황진이로 되어 있다. 그리고 두 가집에 전하는 내용이 완전 일치하지도 않으니, 특히 초장은 《근화악부》에서 “내 정은 청산이요 님의 정은 녹수로다.”라 되어 있는데, 《대동풍아》에서는 “청산은 내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라고 바뀌어 그 맛이 훨씬 달라졌다. 《대동풍아》는 1908년에 편집된 책이요 작가의 표기도 정확성이 별로 없는 가집이라는 점에서 그 기록이 의문시되고 있다.
황진이의 작품은 주로 연석(宴席)이나 풍류장(風流場)에서 지어졌고, 또한 기생의 작품이라는 제약 때문에 후세에 많이 전해지지 못하고 인멸된 것이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전하는 작품은 5, 6수에 지나지 않으나 기발한 이미지와 알맞은 형식, 세련된 언어구사로 남김없이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참고문헌
燃藜室記述, 錦溪筆談, 松都紀異, 於于野談, 李朝女流文學 및 宮中風俗의 硏究(金用淑, 淑明女子大學校出版部, 1970)
歷代時調全書(沈載完, 世宗文化社, 1972)
黃眞伊와 許蘭雪軒(金東旭, 現代文學 9, 1955)
黃眞伊의 詩와 韓國詩의 本質(趙雲濟, 月刊文學 32, 1971). 〈崔東元〉
from:http://kdaq.empas.com/koreandb/history/kpeople/person_view.html?n=14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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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황진이........
2006-02-19 01:02:21
- 꿈 -
황진이
相思相見只憑夢 (상사상견지빙몽 ) 그리워라, 만날 길은 꿈길밖에 없는데
訪歡時歡訪 (농방환시환방농 ) 내가 님 찾아 떠났을 때 님은 나를 찾아왔네
願使遙遙他夜夢 (원사요요타야몽 ) 바라거니, 언제일까 다음날 밤 꿈에는
一時同作路中逢 (일시동작로중봉 ) 같이 떠나 오가는 길에서 만나기를
황진이(黃眞伊)
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 개성의 기생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정확한 생존연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녀가 1520년대에 나서 1560년대쯤에 죽었을 것이라는 것만, 진이와 사귄 사람들의 일화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또 진이의 출자(出自)가 황진사의 서녀라고 전해져 있지만, 그녀는 개성의 아전진(陳)가에서 기녀의 몸을 빌어 태어났다는 것과 그녀의 기명이 명월(明月)인 것만은, 종실 벽계수(碧溪守)와의 수응에서 확실한 것 같다. 당시만 하여도 전국에 공식적으로 약 3만 명의 기생이 있었다.
원칙의 불의 속에 서 태어나 관원 남성들의 노리개 거리로 존재한 해어화(解語花)인 진이가 왜 이렇게 유명하고 신화적(神話的) 조명까지 받아왔는가?
그 원리는 간단하다. 당시, 사랑을 할 수 있는 장(場)은 기방(妓房)뿐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정신적인 세계에 머물지 않고 육감적(肉感的)인 한에 있어서는 그녀의 미모와 지성은 그런 전설을 불러일으킨 진원이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그런 것을 초월 해서 전국민의 애인이 되었는데, 그 한몫을 진이의 전설을 부연한 문인과 소설가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은 지금이나 예나 같은 심정이었던지, 진이를 에워싼 인물로 야사(野史)에 전하는 것만, 철학자 서경덕(徐敬德), 재상 송순(宋純), 진이와 동거했다는 종실(宗室),이언방(李彦邦), 재상 소세양(蘇世讓)등이 있고, 망신한 이로 지족선사( 知足禪師)가 있고, 진이의 사적을 기록한 이로서도 허균(許筠)과 이덕형(李德炯), 유몽인(柳夢寅)등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백호( 白湖) 임제(林梯)는 진이의 무덤에서 시조를 읊고 치제(致祭)했다 하여, 빈축을 사고 급기야 파직을 당한 것도 특기할 만 하다. 4백년 뒤, 이런 것을 많은 현대문인들이 참여해서 다시 부연해서 진이는 이제 기생으로서 전 국민의 애인이 되었다. 진이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해어화(解語花)로 존재했겠지만, 오늘날까지 숭앙을 받고 있는 것은 그녀의 문인(文人)다운 풍모, 즉 6 수의 시조와 4수의 한시(漢詩)가 있기에 이를 받아들이는 이조 문치주의(文治主義) 전통이 지금도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
시조야 기방의 가요니까 진이가 손쉽게 지었다고 치더라도 한시는 평측(平仄)을 맞춰야 하니까, 당시로 해서는 일정한 교양을 쌓아야 한다. 여기에서 황진사 딸이라는 전설이 나왔을 것이다. 그것은 진이의 머리가 비상하다는 증거가 될 것이고, 당시 사람 들에게 사랑 받았을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더욱이 시조, "어뎌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모로던가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난 졔 구태야 보내고 그리난 情(정 )은 나도 몰라 하노라."
에서는 변칙적인 작법을 쓰고 있는 이 '졔구태야'의 용법 은 특기할 만하다. 그래서 몇 수 안되는 시조를 가지고 국문학사상 하나의 이정표(里程標)가 되어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진 이를 육감적인 의미의 해어화로 파악할 수는 없다. 단지 그녀의 전설을 추체험(追體驗)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진실이 있다면, 오늘도 황진이는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울의 환락가에 있는 호스테스 중에서 누군가가 오늘의 황진이가 될 수 있 을 것이니 이는 또 역사와 전통의 진실일 것이다. -김동욱(金東旭)(연대교수 )
● 황진이(黃眞伊)의 작품 세계
다정다감하면서 기예에 두루 능한 명기(名妓)였던 황진이는 시조를 통하여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주로 사랑에 관한 내용을 담은 그의 작품들은 사대부 시조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표현을 갖춤으로써 관습화되어 가던 시조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고 평가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체념을 '靑山은 내 뜻'이라고 역설적인 자기 과시로 표현하거나. 왕족인 벽계수(碧溪守)를 벽계수(碧溪水)에 견주어 유혹할 수 있는 등의 재치는 황진이만이 할 수 있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황진이의 시조에 이르러서야 기녀(妓女) 시조가 본격화되는 동시에 시조 문학이 높은 수준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불어 번역판
Cette longue nuit de decembre
ayant coupe une parcelle de ses reins
Sous la couverture du Vent de Printemps
l'ayant glissee
pli selon pli
La nuit ou sera venu le bien aime
pli selon pli
Je la deplierai
황진이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버혀내여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드란 구비구비 펴리라
from:http://mlbpark.donga.com/board/ssboard.php?bbs=b_bul&s_work=view&no=149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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几则早期《黄真伊》的相关报道及资料
松都三绝
黄真伊、徐花潭、朴渊瀑布。
韩国松都(现在的开城)有名的两个人和一个瀑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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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年08月24日--25日韩国歌剧——《黄真伊》
2000/07/28 16:40
中韩建交8周年纪念演出一代女诗人传奇般的人生
第一幕--黄真伊不顾母亲的反对,用送给灵魂的歌为暗恋自己而死去的小伙送别。母亲忙着准备她的婚事,但她毅决定落户青楼。
第二幕--改名为明月的黄真伊凭借美貌与才华,结识并征服了众多的官吏和名流。在接见碧溪水的那一天,她遇到了风流倜傥的李士宗,被他的歌声深深吸引。
第三幕--无拘无束的生活无法填补黄真伊内心的空虚,不满世俗与偏见的她找到了儒学家花潭和高僧知足。
第四幕--黄真伊找到朝思慕想的李士宗,并开始了约定的三年同居生活。三年转瞬即逝,黄真伊欲为这段美好的回忆画上句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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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鲜作家洪锡中长篇小说《黄真伊》获19届万海文学奖
据韩国媒体消息,今年63岁的朝鲜小说家洪锡中被选为韩国第19届万海文学奖的获奖者。获奖作品是长篇小说《黄真伊》,小说以已故名妓黄真伊为主人公,描绘了超越主仆关系的爱情故事。洪锡中的祖父也是历史小说作家,他1941年生于汉城,1948年随祖父到了朝鲜。
这是几十年来朝鲜作家首次获得韩国颁发的文学奖。此事在韩国文坛引起了不同反响。有人对获奖资格和审查标准提出了异议,还有一些人认为,这是考虑到最近韩国朝鲜交流频繁的情况而做出的评选结果。
评奖方表示,将通过合法程序邀请获奖者赴韩,并付给奖金1千万韩元。他们同时表示,朝鲜方面会不会响应此事,还是个未知数。
新京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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韩国歌剧《黄真伊》:红颜薄命仍抗争
http://ent.sina.com.cn 2000年07月27日18:46 光明日报
伟大的思想家、文学家鲁迅对于妇女问题常有许多精辟的见解,例如他在《男人的进化》一文中就指出:“父母之命媒妁之言的旧式婚姻,却要比嫖妓更高明。这制度之下,男人得到永久的终身的活财产,当新妇被人放到新郎的床上的时候,她只有义务,她连讲价钱的自由都没有……”因此,在封建社会里的某些才貌双全的女性宁愿遁迹青楼也不愿受封建婚姻的束缚。有时,她们得以和一些文人雅士交往,获得暂时的精神上的满足,但是封建社会视女性为附庸、为奴隶的本质使她们的幻想终于破灭,走向了悲剧性的终点。因此,在中国的许多传统文学、戏剧名著中便出现了一系列这样生动感人的艺术形象。这儿有《焚香记》中以死抗争,死后的鬼魂也要向抛弃了自己的负心郎王魁复仇的敫桂英,也有在《杜十娘怒沉百宝箱》中怒斥了见利忘义打算出卖自己的情人李甲之后,怒沉了百宝箱、然后投水自尽的杜十娘,更有在《桃花扇》中忧国忧民、蔑视权贵,于国破家亡山河改色之际去深山修道的李香君……,在这类作品中,女主人公的结局最“好”的也不过是“老大嫁作商人妇”的琵琶名手,她在浔阳江船上忍受着“重利轻别离”的丈夫去浮梁买茶后的寂寞,只好以弹奏琵琶来排遣忧闷,但是,原来围绕着她的那些纨绔子弟们都早已离她而去,精湛的演奏只赢得了“同是天涯沦落人”的江州司马的一掬同情之泪(白居易:《琵琶行》)!
即将于8月下旬在北京演出的韩国歌剧《黄真伊》是根据真实的历史人物而创作的。黄真伊的人物原型生活在16世纪的朝鲜开城,自幼就显露出了音乐和文学的才能,但仅仅是由于她系庶出(即为妾所生),便不能和所爱的不同社会地位的青年结合,因此她宁愿冲破封建伦理道德的束缚去追求自由自在的生活。在青楼的黄真伊改名明月,她色艺双绝,结识了许多文士名流,然而繁华、无拘束的生活仍然无法填补她内心的空虚,和风流倜傥的士人李士宗的同居也只是短暂的幸福,从儒学家花潭和高僧知足那里领悟的道理也无法抚慰她不安的心灵,最后,她只好在金刚山的美丽风光中徜徉流浪,让躯体与灵魂消失在大自然之中,她的结局远比她那些中国的姐妹要潇洒、超脱。这部美丽的韩国民族歌剧的立意与中国的某些同类题材的古典文艺作品何其相似,说明了中华民族和朝鲜民族自古以来社会生活和文化上的交往的频繁和深入。即如在《黄真伊》里面,她不仅吟诵中国的古诗来表达自己的情愫、与知友唱和,还用汉诗的体裁进行创作。这种文化交流对于这点,直到今天还随时随地显现出来,我在汉城便有过深刻的体会。
那是在1991年初秋中、韩建交前夕,我应邀去汉城参加联合国教科文组织的一次关于亚洲、太平洋地区文艺工作的研讨会,与会的除了许多东亚和东南亚国家的代表外,还有如澳大利亚、新西兰等西方国家的人士,于是,代表们在文化传统上的差异立刻非常鲜明地在会上和日常生活中表现了出来。韩国代表中的年长者大多能读、写汉字,与我交谈时引经据典、孔子、孟子脱口而出。会议的主席之一是一位韩国的老太太,她是该国书法家协会的主席,后来我们到汉城的文联大楼去参观时来到了她的办公室,满墙是笔力遒劲的汉字对联、条幅,大多出自她的笔下。在历史博物馆参观时,也看到了大量的古代朝鲜的美术作品及工艺品,包括文房四宝,与中国的同类作品和产品的风格十分相近。有趣的是,当会议结束东道主向代表们赠送纪念品时,一位新西兰的代表拿着一只赠送的象个小瓷壶的“滴砚”问我:“这个waterdrop是什么玩意儿?”我在向他解释的时候,韩国代表吕石基老先生冲我挤眼一笑,意思好象在说:“这只有咱们懂得。”
韩国的歌剧事业起步较晚,尽管有许多韩国的学习西方音乐的人士如郑京和、郑明勋早已在西方音乐界取得了很高的地位,在声乐方面也有如洪惠敬、徐寿美等优秀的歌唱家驰骋于欧、美各大歌剧院,与卡拉扬、多明戈等大师同台演出,但是以自己的歌剧团体在国内演出自己创作的朝鲜民族风格的歌剧却是比较晚的事情了。成立于1989年的韩国歌剧团填补了这个空缺,而且致力于朝鲜民族歌剧的创作和演出,实在可喜可贺。人们常说:代表一个国家或民族文化的最高成就者就是歌剧,这是很有道理的,因为歌剧包括了戏剧、音乐、舞蹈、舞台美术等多种因素,综合性最高,既能表达深邃的思想内涵,又有很高的艺术性和观赏性,不仅欧洲各文化传统深厚的国家如意大利、奥地利、德国、法国以及俄罗斯都以其数世纪的歌剧的辉煌成就而自豪,就是在文化上后进的美国,也不仅仅满足于它在交响乐和通俗音乐上的领先地位,而是在歌剧事业上急起直追,一些美国的戏剧、文学名著都于近年来改编成了歌剧,如《欲望号街车》、《琼斯皇帝》、《槐树下的恋情》、《了不起的盖茨比》等等。中国、朝鲜民主主义人民共和国的富于革命传统的歌剧事业都已经有了半个世纪的历史,在人才培养和创作上都有相当高的成就,甚至超过了亚洲的经济大国日本。如今韩国也赶上来了,我相信以朝鲜民族的能歌善舞的天赋和顽强拼搏精神,不日将取得丰富的成果。即以这次来访的《黄真伊》而言,它在将朝鲜民族的传统音乐与西方现代音乐的融合方面已经取得了不俗的成绩,演员的声乐水平也较高,假如能在导、表演艺术方面再作进一步的讲求就更好了。愿中、韩两国的歌剧界在互相鼓励中共同前进!(刘诗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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韩国歌剧首次来华 《黄真伊》演绎真实人生
第三届亚洲艺术节又有好戏登台。在中韩建交8周年之际,成立于1989年的韩国歌剧团,把韩国著名编剧家具常、作曲家李永朝、导演李长镐历经十几年精心编排的以16世纪名妓黄真伊的一生为题材的歌剧《黄真伊》奉献给中国观众,将于8月24日、25两日晚在北京世纪剧院上演。
生活在朝鲜中宗时期开城的黄真伊投入“青楼”罕见地出于自愿。黄真伊出生在开城的一个进士家庭,她有文学天赋,美貌如仙,在诗歌、汉文、书法等领域成绩显赫。她的诗至今仍收入韩国中学课本。她的汉文成为中韩历史友好交往的见证。但黄真伊的母亲是侍妾,在当时封建社会十分受藐视,她从小就显现出叛逆的性格,长大后又毅然走出家门落户“青楼”,当了一名艺妓。她超越时代的独立思想性格实属罕见。此次出演韩国歌剧《黄真伊》的主要演员全部毕业于意大利音乐学院,并多次在国际比赛中获过大奖。唱法是西洋的,而音乐、内容却具有东方性和民族性,并由我国中央歌剧院交响乐团伴奏。(刘净植)
《北京青年报》 2000年08月07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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