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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영 & 한은정, ‘애잔하게 바라보고 치열하게 연기하다’
2008-08-29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세계 최초 로켓 화포 ‘신기전’이 영화로 완성됐다. 숨겨진 역사 속엔 놀라운 위력의 신기전이 있고 신기전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진중하면서 동시에 유쾌함을 잃지 않는 가공의 이야기를 이끈 두 사람, 정재영 한은정을 만났다. 애잔한 눈빛을 주고받는 두 사람은 <신기전> 안에서 치열하게 연기했다.
정재영 ●●뚝심 있게 노력하고 부딪치며●●
정재영은 김유진 감독을 믿었다. <와일드카드>는 기존의 형사물과는 만듦새가 달랐다. <약속>도 기존의 멜로와는 달랐다. 원래 사극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극 <신기전>을 선택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대중의 까다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 영화를 선택한 건 너무나 당연했다.
“설주는 여러모로 기존에 내가 해왔던 캐릭터와 많이 다르다. 이렇게 대사를 빠르게 쳐도 되나 싶을 정도로 호흡이 빨랐다. 오버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었고. 하지만 이 영화가 흘러가는 리듬에서 설주라는 인물이 당연히 해야 하는 몫이었다.”
중간중간 영화를 흥겹게 하는 코믹 요소도, 흔히 말하는 정재영식 코미디와는 다르다. 전에 했던 코미디가 퉁명스럽게 툭툭 던지는 식이었다면 이번엔 거의 슬랩스틱에 가깝다 할 것이다. 몸을 바쁘게 움직인다. 얼굴 근육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예민한 표정도 나온다. 하지만 인물을 과장시키거나 흐름을 튀게 하진 않는다. 사극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장면에서 진중한 면이 합쳐지면서 능글능글한 설주의 모습이 완성된다는 걸 알았다.
“가장 먼저 감독님이 원하는 흐름을 이해해야 했다. 이 장면에서 과연 설주는 어떤 느낌일까 고민했다. 만약에 관객들이 설주를, <신기전>을 외면한다면 그건 만드는 사람이 흐름을 몰랐다는 뜻이 되는 게 아닌가.”
옷도 헤어스타일도 익숙지 않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동안 전국을 누비며 촬영했고 치열한 액션을 소화해 냈다. 어느 날은 촬영이 중단될 정도로 심한 고열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전과는 다른 연기에 스스로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흐름을 읽었다. 늘 하던 대로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배우가 진실이라고 더 굳게 믿어야 했다. 진심으로 진실하게 연기하지 않으면 관객이 그 마음을 느낄 수 없음을 설주를 통해 증명해야 했다.
“결국 연기라는 건 무대든 스크린이든 얼마나 살아 있으려고 노력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아무리 디렉션이 정확히 들어와도 배우가 정확하게 연기할 수는 없다. 부족한 느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연출이 말하고자 하는 느낌에 플러스 알파로 내가 소화해서 근접하게 표현해야 한다. 그 사람으로 살아 있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다.”
세상은 큰 무대고 그는 그 무대 위에서 매 순간 연기 중이다. 일상의 모두가 그의 모델이고 작품을 하는 순간도 결국은 정재영이란 배우의 트레이닝 과정일 수밖에 없다. 자기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유심히 바라보는 거다. 쉼 없이 달려오는 건 단순히 그를 찾는 작품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최근의 그는 점점 숙제가 늘어나는 기분이다. 단역에서 주연으로, 신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책임져야 하는 게 늘어감을 안다.
“좋은 배우는 좋은 눈을 가져야 한다. 그게 잘 안 되니까, 평생 싸움인 거다. 우리 감독님도 마찬가지고. 처음 찍어보는 액션 신, CG 작업이 필요한 촬영인데 전문가에게 최대한 맡기되 자기 머릿속에 그려낸 장면을 그대로 뽑아내시더라. ‘뭐뭐만 좋더라’ 하는 영화는 곤란하다. 각각이 눈에 띄게 완벽하지 않더라도 합이 좋은 영화가 필요하다. <신기전>이 그렇다. 드라마를 이끌어가기 위해 이야기에 굉장히 정성을 많이 들인 영화다.”
예전 <킬러들의 수다>로 막 주목받기 시작할 즈음 그는 연기 잘하는 배우로 평가받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 목표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좋게 말해주지만 이대로 몇 년간 답보되면 분명 ‘그때는 잘했데…’ 그럴 거다. 연기력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나? 그건 아니다. 연기를 잘한다는 건 세상을 보는, 작품을 선택하는 눈이 좋다는 것이다. 어떤 작품을 선택하고, 어떤 연기를 하고, 관객들이 질리지 않을 만한 신선도를 유지하느냐가 결국 누가 오래 연기하느냐의 관건이 되겠지. 최상의 신선도를 유지하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신선도를 유지하면서 또 다른 포장을 하는 거다.”
정재영은 늘 변주를 거듭해 왔다. 그건 배우로서의 신선도를 유지하면서 점점 늘어나는 숙제를 소화하는 그의 방식이다. 보기 반듯한, 틀에 박힌 인물은 지양한다. 그렇다고 삐딱한 인물을 일부러 찾는 건 아니다. 좋아한다는 것보다는 그게 지금의 세상에 맞는 리얼리티이기 때문이다.
“예전엔 전형적인 연기가 통했다. 사람들은 매너 좋고 멋있는 배우를 보면서 각성을 했다. 마치 원시인들이 몰랐던 것을 보며 깨닫는 것처럼. 그러던 어느 날 제임스 딘이란 삐딱한 배우가 한 명 등장했는데, 어, 이게 너무 멋있는 거다. 그때부턴 이게 리얼리티가 된다. 바뀌는 거다. 지금의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이 정도면 되겠지’로는 턱도 없다. 더 디테일해져야 하고 세심해져야 한다. 대중의 눈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올림픽 대표팀을 열정적으로 응원하기에 앞서 그들을 보며 ‘나는 뭘 하고 있나’ 반성을 먼저 하는 배우가 정재영이다. 배우에겐 운이 7할, 노력이 3할이라고 주장하지만 노력 없인 절대로 좋은 배우가 될 수 없음을 확신하는 배우 또한 정재영이다. 그 배우 정재영이 <신기전>으로 자체 평가에 들어갔다. 성적표를 공개할 참은 아니지만 어쩐지 만족스런 점수가 매겨져 있을 것 같은 강건한 표정이다. 이유진 기자
한은정 ●●힘겹게 돌아 이 자리에●●
<신기전> 시사회가 있던 날, 한은정은 영화를 볼 수 없었다. 주연 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일 기회를 맞이해, 영화 상영 내내 TV 인터뷰가 잡혀 있었다.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잠깐 요기를 하고 <무비위크> 스튜디오로 날아왔다. 촬영하고, 인터뷰하고, 촬영하고, 인터뷰하고. 세 시간 후에는 <대한민국 변호사> 드라마 촬영이 있다. 긍정적인 마인드에 막강한 체력을 가진 한은정은 그래도 웃는다. 정재영도 한은정 같은 여배우는 처음 봤는지, 깜짝 놀랐던 에피소드를 말해주려고 열심이다.
“촬영 안 할 때는 방에서 윗몸 일으키기를 하더라니까. 촬영이 늦는다고 트레이닝복 입고 조깅을 하지 않나.” 김유진 감독도 대기 시간에 조깅을 하는 배우는 처음 봤다고 했다. 그 모든 반응에 한은정의 대답은 “심심해서…”였다. <투 가이즈> 이후 오랜만에 돌아온 터라 영화 현장이 낯설었다. 느슨한 진행에 대한 적응이 쉽지 않아 그녀는 ‘조선의 포레스트 검프’가 되었다.
“나는 집에서 출퇴근하는 드라마 방식이 익숙해서, 촬영 간다고 짐을 싸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로케이션 왔는데 운동도 못하고 걸을 데도 없으니까 너무 답답하더라. 운동을 안 하고 있으면 또 얼굴과 몸이 붓는지라. 평소 리듬대로 못하니까 미칠 것 같아서 방 안에서 만날 윗몸 일으키기를 했다. 여자가 없으니까 어울릴 친구도 없고. 심심하니까 꼬박꼬박 밥은 먹고.”(웃음)
얄밉게도, 김유진 감독과 중년의 남자 배우들은 밤마다 막걸리 술판을 벌였다. 그때마다 한은정은 얼굴 부을까봐 맛있는 시골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시고 물러서야 했다. 여배우의 현실이 그토록 고통스럽긴 처음이었다. 음주가무를 자제했던 금욕의 자세가 <신기전>의 고집 센 과학자 ‘홍리’에 담겼다. 아버지가 개발하던 신기전과 악전고투를 하면서 한 번도 포기하지 않는 캐릭터다. 조국에 대한 어떤 애정도 없었던 상인 설주는 홍리의 아름답고 당당한 모습에 반해 그녀를 돕는다.
“한은정이 사극에도 어울린다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어색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좀 더 확 풀어지는 캐릭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똑 부러지는 역할 말고 바보스럽게. CF 이미지를 과감하게 포기하고!”(웃음)
CF로 연예 생활을 시작한 한은정은 정체성에 대한 커다란 딜레마를 안고 살아왔다. 콜라 CF에서 감히 한국인이라 상상할 수 없는 몸매로 화제가 됐던 그녀는 ‘섹시한 도시 여성’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물론,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게 많다. “그 이미지가 어떻게 보면 참 난관이다. 광고 효과가 커서 솔직히 이미지를 저버릴 수는 없다.”(웃음)
그러나 연기보다 외모로 먼저 주목받았던 시기에 통과의례 같은 슬럼프가 있었다. 드라마 <서울 1945>가 그녀를 구원했다. 모처럼 연기에 대한 칭찬도 이어졌다. 이젠 죽을 때까지 연기를 하겠다는 마음이다. “연기가 좋아서 열심히 하는 거지, 부를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다. 이걸 안 하면 병이 날 것 같아서 연기를 한다.”
<신기전>에서 홍리의 비중은 정재영의 설주에게 뒤지지 않는다. 과학자로서 사용해야 하는 전문용어들이 대사 곳곳에 숨어 있기도 하다. 노력과 욕심의 이중주가 빤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한은정은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라고 연기 과정을 간단하게 정리한다. 리허설과 본촬영이 달라져 황당할 때도 있었지만 “섬세한 부처님 같은” 감독의 손을 거쳐 편집되는 과정을 보며 무릎을 탁 쳤다. 영화는 영화였다. CF도, 드라마도 아니었다. 뒤늦게 ‘연기 몰입’ 중인 그녀는 겸손하게 하나둘 배우고 있다. 정재영을 만난 것도 행운이다.
한은정에게는 연기도 몸도 모두 소중하다. 자신의 몸매를 예쁘게 봐주는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 운동을 거르지 않는다. 몸이 달라지면 ‘정신이 헤이해졌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헬스클럽을 오가지만, 이 정도 각오면 ‘심신일체’를 고수하는 무도인의 경지다. 몸만큼 생활의 ‘틀’도 꽉 짜여 있어서, 이제는 노멀 라이프가 낯설어졌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노력의 대가가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믿음이 그녀의 인생을 지배한다.
“나는 한 번에 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 시행착오와 아픔을 겪고 뭔가를 만들어내는 그런 팔자? 아픔도 겪고, 쓴맛도 보고. 남들처럼 편하게 계단을 못 오르는 것 같아 속상할 때도 있다. 한편으론 그렇게 올라갔으니 쉽게 내려오진 않을 것이란 믿음도 있다. 낙천적으로!”(웃음) 옆에서 보던 정재영이 “정말 낙천적이라니까!” 하며 빙그레 웃는다.
“<신기전>에 대한 좋은 얘기들만 들려서 아직까지 부정적인 생각은 안 하고 있다. 시행착오를 겪고 있으니 이번에는 ‘운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배우로 성공하려면 ‘운이 7할,‘노력이 3할’이라고 주장하던 정재영이 한은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당연하다는 듯이 외친다. “이번에 잘되면 네가 밥 사!” 푸하하하. 의외로 털털한 여자 ‘몸짱’의 웃음소리 속에 왠지 모를 자신감이 섞여 있다. 홍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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