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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우 감독의 신작 <모던보이> 미리 보기
지난 설날의 극장가는 이색적인 풍경을 준비하고 있었다. 설날영화들의 대목경쟁도 관심사였지만,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지점은 경성이란 도시를 담은 3편의 영화가 동시에 맞붙는다는 것이었다. 참가할 선수들은 조선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를 만드는 소동극을 그린 <라듸오 데이즈>와 전설의 보석을 둘러싸고 일본군과 독립군, 사기꾼이 활극을 벌이는 <원스 어폰 어 타임>, 그리고 조국을 뺏긴 슬픔보다 연인을 잃은 절망에 허우적대는 남자의 애달픈 방황을 그린 정지우 감독의 <모던보이>였다. 2편도 아니고 3편이라는 점에서 당시의 상황은 기이했다. 어쩌다 동시에. 예상할 수 있는 이유는 3편 모두 한껏 달아오른 경성트렌드의 붐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어느 한편이 먼저 개봉할 경우, 트렌드와 맞물릴 이점들을 죄다 채갈 것이 분명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던보이>가 개봉을 연기했다. 제작진이 밝힌 사연은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 후반작업을 보충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설날 시즌에는 <라듸오 데이즈>와 <원스 어폰 어 타임>만이 개봉했고, <모던보이>는 4월 말로 개봉날짜를 변경했다. 그리고 2개월 뒤인 4월. <모던보이>의 주연배우인 박해일은 모 영화월간지의 4월호 표지를 장식했고, 이것은 개봉에 대한 확신처럼 보였다. 하지만 <모던보이>는 다시 개봉을 연기했다. 이번에는 날짜를 밝히지도 않았다. 아마도 여름 성수기에 개봉하지 않겠냐, 추석 시즌에 개봉할 것이다 등등 많은 억측이 난무했다. 소문도 잠시였다. 아이언맨이 휘젓고, 수상한 세놈이 만주 벌판을 누비고, 배트맨이 조커와 혈전을 벌이는 새 <모던보이>는 잊혀졌다. 경성이란 옛 도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사라졌다. 그리고 8월이 됐다. <모던보이>는 다시 10월2일에 개봉한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모던보이>는 지난 6개월 동안 어떤 궁리를 하고 있었던 걸까. ‘경성의 랜드마크들을 보여주겠다’는 정지우 감독의 야심은 어떻게 구현됐을까. <씨네21>은 영화 속 경성을 설계한 CG의 결과물을 통해 <모던보이>를 미리 엿볼 수 있었다. 내친김에 정지우 감독과 주연배우인 박해일, 김혜수도 만났다. 제작보고회까지 열었으니, 이번에는 진짜 개봉할 거라고 믿었다.
5.1채널의 경성, CG로 만들어낸 ‘잘생긴’ 도시
지난 8월21일, <모던보이>의 CG를 맡은 인사이트 비주얼의 회의실에서 정지우 감독을 다시 만났다. 개봉이 6개월이나 미뤄지면서 아쉬운 부분과 천만다행으로 느낀 부분이 동시에 있었겠다고 물었다. 그는 “전체적인 공정을 ‘리셋’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내가 해볼 수 있는 건 다 시도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설날에 맞추려고 무리수를 두었던 작업들을 다시 풀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4월은 정말 안 좋은 시기였던 것 같다. 경성을 다룬 다른 작품들과 2개월밖에 텀이 나지 않는 시기였기 때문에 아류는 아류대로 보이고, 작업은 내실있게 못하는 상황이 됐을 거다.” 전작인 <사랑니>의 편집을 직접 했던 정지우 감독은 이번에도 6개월이란 시간의 상당 부분을 홍제동에 마련한 편집실에서 지냈다. 주위 사람들이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해도, 학교 선배인 설경구가 “컴퓨터 앞에 죽치고 있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며 그를 밖으로 끌어내도, “계속 눈에 띄는 영화의 틈들을 그냥 놔둘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게 은근히 중독성이 있더라. 편집을 하다보면 이상한 틈들이 계속 눈에 띈다. 결과가 더 좋아지는 것과 별개로 이러다가 정말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웃음)” 다행히 살아남은 정지우 감독은 편집을 끝냈고, <모던보이>는 현재 CG와 믹싱, 색보정 작업의 막바지에 와 있다. 이날 회의는 정지우 감독이 레이저 포인터를 들고 CG분량을 ‘컨펌’하는 시간이었다. 영화의 전편을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던보이>가 다른 경성영화와 차별점을 강조하는 지점들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로는 충분했다. 정지우 감독은 초조한 마음은 없다고 했다. 영화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모든 게 ‘진인사’했다는 뜻이다.
“5.1채널의 경성을 보여주겠다.” 지금까지 들었던 <모던보이>를 부연하는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말은 정지우 감독이 아닌, 이재진 음악감독의 말이었다. 657호 <씨네21> 특집기사에 따르면, <모던보이>의 음악은 축음기의 음질로 시작해, 5.1채널의 서라운드로 변신한다. “아마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축음기 소리가 5.1채널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처럼 <모던보이>도 모노가 아닌 5.1채널 버전의 경성을 보여주겠다는 의도였다.” 그와 비슷하게 <모던보이>는 실제 경성의 기록영상으로 시작한다. 거친 흑백영상 속의 경성은 색깔뿐만 아니라 감정마저 거세된 도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해명(박해일)의 출근준비다. ‘뽀사시’한 컬러영상 속의 해명은 축음기를 켜고, 모닝커피를 만든다. 담배와 지폐클립을 챙긴 해명이 거울을 보며 모자를 쓸 때, 그는 자신의 외모에 만족하며 말한다. “음, 잘생겼어.” 망점이 도드라진 흑백영상으로 시작해 ‘잘생겼다’는 말로 마무리를 짓는 이 시퀀스는 이제 관객에게 보여줄 경성의 풍경에 대한 자신감처럼 보였다. ‘등장인물들이 경성을 내달리고 싶으면 내달리게 해주고 싶다’는 감독의 야심이기도 할 것이다. 정지우 감독이 2.35:1의 와이드 스크린에 가득 채운 경성의 전경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미쯔비시 백화점 옥상의 평화 레스토랑에서 난실(김혜수)과 해명이 난실의 사촌오빠인 오가이(김영재)와 함께 카레를 먹을 때,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성 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창문마다 불이 켜진 채 빼곡히 들어차 있는 건물들이 펼쳐지는 한편, 건물들 사이에 놓은 도로에는 가로등이 빛나고 전차와 사람들이 제 갈 길로 움직인다. 이어지는 신에서는 오가이를 데리고 그의 집으로 향하는 해명의 모습 뒤로 도시 한복판의 풍경이 드러난다. 술에 취한 사람들과 인도와 차도의 구분없이 길을 점거하는 자동차들, 거리를 타고 이어지는 고압선, 그리고 그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는 전차의 모습들이다. 해명의 ‘자뻑’처럼 CG컷들로 확인한 <모던보이>의 경성은 꽤 ‘잘생긴’ 도시다.
경성의 모습은 물론 정서와 문화까지 보여주겠다
정지우 감독은 “화려한 경성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 외에 또 다른 야심을 덧붙였다”고 말했다. 잘생긴 도시를 배경으로 인물들이 어떤 상황에 놓이는가의 문제다. “그렇게 화려한 풍경이 아름다운 사람의 배경이었다면 훨씬 더 임팩트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는 이른바 말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한다는 시선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일부러 망가진 인생의 모습,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섞어놓았다. 약간 말장난인데, 식민지 근대화론을 일방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시선에 나는 이 이미지로 동조하고 싶었다. 이런 게 또 다른 야심이다. (웃음)” 감독의 야심은 <모던보이>의 CG가 단지 경성의 화려함뿐만 아니라 본모습까지 재현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모던보이>의 밤이 총천연색 화려함으로 그려졌다면, <모던보이>의 낮은 쨍하게 맑은 빛을 머금는다. 지금으로 치자면 서울역 앞 대우빌딩에서 볼 수 있을 경성역의 모습은 사람과 자동차 빼고는 모두 CG로 그려넣은 풍경이지만, 대규모 오픈세트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사실적이다. “엔딩 크레딧에 CG담당자 이름을 넣지 않으면, CG를 눈치챌 수 없게 만드는 CG”를 추구한 <모던보이>는 이 밖에도 여러 장관을 연출해냈다. 난실을 찾는 해명의 차가 급하게 달리는 장면에서는 옛 동대문과 주변의 거리들이 재현됐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할 조선총독부는 지금은 사라진 중앙청 건물을 외벽의 질감까지 그대로 그려넣었다. 이것은 <모던보이>와 경쟁할 뻔했던 다른 경성영화들과 비교할 때도 가장 두드러진 차별점이다. 경성을 배경으로 놓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정서와 문화를 보여주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던보이>가 드러내는 당시 경성의 문화는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해명과 신스케, 그리고 모던걸들의 소풍장면에서 엿볼 수 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과도 같은 분위기의 소풍에는 와인과 곶감, 북어포가 놓여 있고 한쪽에서는 가야금을 타며 탕국을 끓이고 있다. 그처럼 서양과 동양, 과거와 근대의 문화들이 이합집산된 당시의 경성은 또한 흥청망청의 쾌락주의와 극단적인 감정의 폭발이 오가는 곳이기도 했다. 암흑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혼자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었던 모던보이가 어느 날 여자에게 눈이 멀어 자신을 부숴버린다는 이야기는 그러한 시대의 불안한 정서에 근거한다. 결국 감독의 말대로 화려한 도시 한복판에 놓인 <모던보이>의 인물들은 망가질 수밖에 없다.
사실, 전경을 드러내는 연출은 정지우 감독의 전작에서 보기 힘든 부분이다. 언제나 배우를 중심에 놓는 그의 영화는 인물들의 치열한 감정에 밀도를 높였다. 이는 애초에 경성을 또 다른 중심 캐릭터로 설정했기 때문이지만, ‘전작의 태도를 지양하려고 한다’는 정지우 감독의 변화이기도 할 것이다. 변화의 또 다른 지점은 음악의 사용이다. 전작들에서 덜 쓰는 음악, 모호한 음악, 인물의 주관적 감성을 한 발짝 늦게 쫓아가는 음악을 구상했던 정지우 감독은 <모던보이>에서는 음악을 좀더 전면에 내세우는 전략을 세웠다. “전형적인 할리우드영화가 음악이 비어 있는 순간이 없는 것처럼 만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음악이 정서를 이끌어주면서 관객이 좀더 쉽게 볼 수 있는 부분에 훨씬 주의깊게 고려하려 했다.” 몇 가지의 변화 외에 <모던보이>에는 전작의 태도를 지양하기는커녕 더욱 심화시킨 면도 있다. 배우가 흥미로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태도다. “배우를 통제하지 않고 막 놔두고 싶은 욕망이 더 세졌다. 이제는 위험할 정도다. 컷을 해야 하는데, 배우들이 마음껏 연기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다가 롤 아웃(필름 한 롤이 끝나 새로운 롤을 넣기 전엔 더 촬영할 수 없는 상태)이 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다보니 핸드헬드로 촬영한 화면의 움직임은 더욱 격렬해졌고, 그래서 CG 담당자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지만, 정지우 감독은 “결론적으로 배우들을 보는 재미만큼은 확실한 영화가 됐다”고 자신했다. “박해일이 해명을 연기할 때면, 이 캐릭터가 가진 골때리는 사람의 기분이 접신하듯 드러나더라. 참 가관인 캐릭터인데, 오히려 촬영이 끝나자 많은 스탭들이 해명이었던 박해일이 그립다고 했다. 김혜수의 경우는 진심을 드러내는 부분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작품이 또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멜로드라마에서 이 정도의 진정성을 드러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두 배우를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만나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시대극, 미스터리, 멜로영화이기 전에 성장영화
잘생긴 도시와 재밌는 배우 외에 <모던보이>를 미리 그려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지점은 정지우 감독이 그동안 이야기해온 ‘지독한 사랑’의 테마다. 극중에서 해명이 난실을 찾아나서는 동안, 그를 측은히 바라보는 한 등장인물의 대사가 중요하다. “쯧쯧, 여기서 멈추면 낭만이 될 텐데….” <모던보이>는 스스로를 낭만의 화신으로 자처하는 남자의 이야기이지만, 영화가 전면에 내세우는 사랑의 풍경은 낭만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애처롭다. 아내에게 당한 배신감으로 지독한 분노를 향해 치닫는 <해피엔드>의 민기처럼, 어느 날 문득 재현되어버린 옛사랑의 지독한 숙명에 시린 계절을 맞는 <사랑니>의 인영처럼, <모던보이>의 해명은 첫사랑의 지독한 열병에서 빠져나올 의지가 없는 철없는 소년이다. 정지우 감독은 해명이 ‘거짓말하지 않는 소년’이라고 말했다. “세간의 평가가 어떨지 고민하지도 않고, 멋있는 걸 택하지도 않고, 진심을 속이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면 손가락질도, 미련해보이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이 말은 <모던보이>의 결말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영화의 원작인 소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의 해명은 죽음도 불사할 정도로 달리던 발길을 멈추고 끝내 자신의 첫사랑을 한때의 낭만으로 완성시킨다. 하지만 영화의 해명은 멈추지 않고 끝까지 내달린다. 정지우 감독은 <모던보이>가 시대극이나 미스터리, 멜로영화이기 전에 하나의 성장영화라고 말했다. “물론 사람이 바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바뀌지는 않아도 달라진다는 걸 이제는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사랑인 것 같다.” 과연 연인을 찾아 헤매던 남자는 절실한 난동의 끝에서 무엇을 발견할까. <모던보이>는 오는 10월2일 ‘진짜’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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