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导演李海俊专访
욕망을 통해 진화하는 이야기꾼 <김씨표류기> 이해준 감독
2009년 5월 28일 목요일 민용준 기자
서울시로부터 밤섬에서 8회 차 촬영만 허가받았다고 들었다. 밤섬과 비슷한 공간을 찾아낸다는 게 관건이었을 거 같다.
연출부와 제작부에서 밤섬과 비슷한 공간을 찾기 위해서 한국에 있는 강이란 강은 모두 다 뒤졌다.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이 중요했다. 모래사장과 모래사장 뒤로 울창한 숲이 있어야 되며 촬영여건을 따지자면 섬보단 차 진입이 가능한 강변이어야 됐다. 그리고 여자의 시점샷을 고려하자면 어느 정도 망원렌즈를 붙여서 찍을 수 있는 거리감이 확보되는 조건도 중요했고 해변이 너무 넓어도, 너무 좁아도 안됐다. 그런 조건들을 찾기 위해서 정말 강이란 강은 다 뒤져서 충주의 주 촬영지를 찾아냈다.
사실 어떤 장면은 밤섬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밤섬 자체의 생태를 설명하는 영화는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이 사람의 심리를 통해 보여지는 밤섬의 모습들이 더 중요했다. 김씨는 밤섬에 처음으로 떨어진 경계의 대상이므로 처음엔 낯선 이방인을 거부하는 날카롭고 뾰족한 느낌의 숲처럼 보이다가 김씨가 점차 밤섬을 자기 공간으로 인식하고 살기 시작하면서 작은 성취감을 이루고 보금자리로 인식하는 순간부터 조금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숲의 이미지가 연출돼야 했다. 그래서 이제 그런 숲의 이미지에 따라서 각자 다른 숲으로 돌아가면서 촬영을 했다. 밤섬 자체를 모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이 남자의 심리를 대변해주는 공간의 필요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천만 인구의 대도시 서울 한가운데를 흐르는 한강의 무인도 밤섬에서 표류를 한다. 이 독특한 소재의 시작이 밤섬이라고 들었다. 사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이미지였을지도 모를 밤섬에 대한 목격을 관찰로 진전시키고 허구의 살을 붙여 나가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일단 보는 순간, ‘아, 저기 섬이 있구나’라고 생각했고, 동시에 그 어둑한 섬이 딱 보아하니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무인도 같아서 낯선 느낌이 들었다. 그런 곳이 있다라는 건 얼핏 알았지만 그게 여기라는 건 그때 보고 알았지. 공간 자체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밤섬 주변에 서강대교에 허락된 가로등을 제외하곤 일체 조명을 못하거든. 그래서 그 주변이 굉장히 어둡다. 그런데 그 백(back)엔 화려한 시티라이트가 있고, 그 가운데 어둡게 자리잡은 섬이라니 공간의 재미가 오더라. 지금 저기에 한 남자가 살려달라고 손을 흔들고 있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거의 동시에 들었는데 차를 타고 가는 내가 그 남자를 발견했을까, 혹은 발견했더라도 그 남자의 구조신호를 인지했을까, 아니면 그냥 사람이 있네 이러다 말고 지나갔을까. 이런 무심한 속도감 속에서 그 사람과 나와의 거리감, 그 관계성, 그런 생각이 집에 돌아갈 때까지 계속 남아있더라.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시작됐다.
결국 밤섬을 이야기의 척추로 삼아 캐릭터의 뼈대를 잇고 다양한 설정의 살을 붙여나간 셈이다. 그리고 남자 김씨의 자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회적으로 몰락한 루저가 밤섬이란 모티브와 연결되는 첫 번째 지점이었나.
글쎄, 분석적이고 전략적으로 ‘루저를 등장시켜야지’ 이렇게 접근한 건 아니다. 그냥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내가 그렇기 때문인 거 같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내가 루저라면 루저고, 그렇게 오랫동안 살았으니까 내가 잘 아는 내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 그러니 항변하고 싶어지는 거고. 내가 우울하거나 그렇게 이해될 존재는 아니고 그냥 남들과 똑같이 사는 사람일 뿐이지만 다른 친구들이 보기엔 번듯한 직장도 없고, 돈도 있다가도 없고, 결혼도 안하고, 뭐 저렇게 무책임하게 사나 싶을 정도로 이상하게 볼 거란 말이지. 그렇게 내 스스로를 항변하고자 하는 이해심을 조금 더 발휘하면 이해되지 않을 존재가 없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소년이 아님에도 그런 얘기를 꺼내고, 자살을 실제로 해보지 않았음에도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냥 이 사람들도 누구나 다름없이 살아가는 존재라고.
현실적인 세태를 대변할만한 설정이 등장한다. 특히 친절하게 채무액을 알려주는 대출업체의 코멘트, 서비스 가입을 권하는 끈질긴 이동통신사 상담원 안내와 같이 겉보기에 친절하지만 진심이 인색한 세태에 대한 은유가 노골적이다.
내가 차를 타고 가는 도중, 조난 문자를 관심 있게 볼 수 없게 만드는 속도감과 관계성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렸을 때 징표처럼 떠오른 이미지다. 그게 그런 전화통화나 유람선에서 손 흔드는 장면과 같은 에피소드로 이어진 거다. 표류라고 하지만 표류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는 거기서 거기다. 말하자면 먹고 살고 생존하는 이야기 후에 찾아오는 어떤 욕망으로부터의 고립감. 그런데 그런 얘기는 <로빈슨 크루소>나 <캐스트 어웨이>같은 훌륭한 작품들 속에서 이미 했고, 내가 그걸 다시 반복할 이유는 없다. 그런 마당이니 일단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돼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바 안에서 써야 하니까 일단 내 자신이나 가족들, 친구들과 같이 내 주변 사람들이 안고 가는 고민과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자연스럽게 투영되더라. 빚 때문에 힘들어 하는 친구도 많고, 내가 그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너무 낯설다 생각했던 경험도 있고, 그런 이야기들에서 확장된 셈이다.
처음 남자 김씨가 섬에서 나오지 못한다는 부분을 묘사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섬에서 나오지 않겠다는 결심에 안착하려면 섬에서 나오지 못하는 과정을 설득시키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
사실 남자가 섬을 못 나오는 상황보단 그 섬에 남는 게 중요하다. 이 남자가 그 섬을 못 나오는 게 아니라고 관객들도 이해할 거라고 믿었고. 이 섬에서 남고자 하는 욕망이 이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열망과 욕망에 맞닿을 수도 있는 지점이 있겠다고 봤으니까. 만약 수영을 잘해서 이 섬에서 나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해도 그 섬에 남았을 것이다. 이 영화가 시작된 계기는 거기서부터라고 봤고. 다만 섬에서 나오지 못하는 20여분의 상황을 코미디로 끌고 갈 수 있겠다고 봤다. “정말 저게 말이 돼?”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일지 모르지만 그 상황을 일종의 은유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판단 하에서 부담없이 지켜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이 섬에 남아야지, 하는 순간부터 저 사람의 입장과 욕망에 대해 관객들도 동의해주고 출발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밤섬이 모티브고 시작점이라면 여자 김씨와 그녀의 방은 추가적으로 나열된 캐릭터와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써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두 가지 정도의 전제를 갖고 시작했다. 이게 단순한 표류 영화가 아니라 요즘의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것과 이 남자와 관계를 맺게 되는 대상에 대한 이야기. 일단 로빈슨 크루소보다 더 로빈슨 크루소 같은 존재가 아이러니하게 등장한 다음엔 표류의 고립감을 어느 순간 희석시키기 보단 그 고립감을 안으로 더 파고 들 수 있는 상황의 존재를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히끼꼬모리를 떠올리게 됐다. 다만 그게 표류기라는 이야기의 단순한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진 전제가 된 건 아니다. 일단 이야기 목표가 표류가 아닌 관계성이라고 결정했기 때문에 태어난 캐릭터였던 거다.
모티브가 밤섬이고 그 밤섬에서 살아가는 남자가 주인공이니 결과적으로 여자 김씨는 이야기의 입체감을 배려하기 위해 후발적으로 창작된 캐릭터와 공간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처음부터 관계성과 소통에 관한 이야기였다고 봤으니까 두 인물로 시작했다. 표류하게 된 남자라는 아이디어에서 아이템들을 떠올렸지만 태생부터 두 사람의 이야기로 설정해서 출발했기 때문에 후생적이라 말할 순 없다. 다만 장편 상업영화를 찍는 감독으로서 얼마만큼 표현하고 얼마만큼 포기할 것인가라는 고민은 늘 있었다. 연출가로서 보는 즐거움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협소한 상황을 이래저래 돌파하고자 하는 작가적 욕심이 생기더라. 단지 내가 생각하는 사실감을 통해 나의 만족을 얻고자 하면 그게 보는 사람의 즐거움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고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노력했다.
자연이 보존된 밤섬의 원시적 풍경과 달리 여자 김씨의 방은 인공적이고 현대적이다. 남자 김씨와 여자 김씨의 공간이 대비적으로 설계됐다.
내가 그렇게까지 분석적으로 뭔가를 계획할 인간은 못 된다. 물론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지만 보는 분들의 재미를 위해서 대차점이나 대비를 이루는 상황의 재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걸 정확하게 목표해서 반대개념이나 대비될 수 있는 요소를 찾았던 건 아니다. 그보단 기본 목표에서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니 자연스럽게 대비되는 요소가 떠올랐고, 그런 만큼 이런 대차점에 주목해서 포장이 가능했던 거지. 다만 그 공간이 서로에게 의미를 준다는 지점이 중요했다. 특히 여자는 이 남자를 발견하면서 컴퓨터의 윈도우가 아니라 진짜 윈도우를 보고 이를 통해서 가상의 친구가 아니라 살아있는 상대를 보게 된다는 기본 개념이 있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컴퓨터 모니터의 블루로 가득했던 방이 창이 열려서 옐로우로, 따뜻한 빛의 공간으로 변하고 이로 인해 어둠 속에 묻혀있던 색도 살아나고 공간이 생기를 얻는 과정으로 변하는 게 표현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채로운 소품들이 저마다 의미를 발생시키며 이야기에 입체감을 이룬다. 다양한 소품들이 영화를 패셔너블하게 꾸미는 것만 같다. 마치 편집증적인 성향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소품을 수집한 것 같다. (웃음)
일단 패셔너블하다라는 것에 동의할 순 없다. (웃음) 어쨌든 나는 소품 하나하나가 이 이야기의 근간을 이루고 놓칠 수 없는 것들이라 봤다. 궁극적으로 사소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지. 사소해서 별로 눈 여겨 보지 않는 것들 가운데 어쩌면 본질적 의미가 있지 않을까. 말과 물질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오히려 그런 게 부족한 사람들이 그 안의 어떤 의미들을 상기시킬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스태프들에게도 소품 하나하나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세심하게 놓치지 말고 끝까지 가자고 당부했고, 그렇게 코미디를 위한 배치나 활용도에서 신경 써나간 측면이 있다.
사소한 소품들을 활용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디테일한 느낌이었다.
표류 얘기에서 사람들이 주목하는 핵심은 이 사람이 뭘 이용해서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가 아닐까 싶더라. 그렇다면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과 비슷한 공간감을 유지하면서도 소품의 본래 활용 방식을 뒤집는 전복의 방식을 활용하면 보는 재미를 줄 수 있다. (커피잔을 가리키며) 사실 이 커피잔은 우리에게 커피를 담는 용도로서 규정된다. 그렇게 우리는 어떤 단정을 물려받지만 어떤 특별한 공간에서 특별한 경험을 하는 사람은 이걸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 규정된 물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쓰레기를 갖고 처음부터 재조립하는 과정을 통해서 진화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느낌이 소품적으로 작용했으면 했다. 버려진 오리배를 갖고 집으로 활용한다거나 뚜껑을 갖고 선글라스를 만들어 쓴다던가, 자신만의 생활방식으로 모든 걸 다 재조립하는 진화의 단계랄까.
관객 입장에서 의미를 수집하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이야기를 통해 소품을 마련하는 입방에서도 그런 수집의 단계가 선행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직업시나리오 작가로서 어떤 정확한 이야기 설계가 되지 않고선 작업을 하지 않았었다. 포스트잇을 쫙 붙이고 모든 과정을 나열하는 방식이었지. 그런데 이번 작품에선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지난 작품을 보면서 조금 반성한 결과랄까. <천하장사 마돈나>를 보고 훨씬 더 생기와 생동감이 넘칠 수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었는데 내가 너무 갑갑하게 찍었구나 느꼈거든. 그 이유는 뭘까 생각하다 보니 역시 그런 방식에서 기인한 게 아닐까 싶더라. 그래서 이젠 그렇게 하지 말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서 단초들만 갖고 무작정 써보자고 마음먹었다. 그저 인물이 가는 대로 받아 적어야 되겠다, 그런 결심으로 시작했고 그냥 남자 김씨의 욕망이 곧 나의 욕망이었다. 캐릭터와 일치된 상태에서 썼다고 할까. 그러니까 김씨의 절실함이 나의 절실함이었다. 단백질을 섭취해야 하니 물고기를 먹어야 되는데 어떻게 잡아야 할까, 그러면 포대기에 나무를 연결해서 해야지, 이런 김씨의 방법이 동시에 나의 방법이었으니까. 고기를 다 잡고 나면 또 무엇이 먹고 싶어지고 욕망하는 게 뭘까, 이런 욕망도 내 욕망이었다. 자장면을 먹고 싶다는 것도 순전히 이야기적 구성요소로 궁리한 게 아니라 내 욕망을 끌어온 거다. 그렇게 나와 일치된 김씨의 욕망을 그때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떠올리며 표류하듯이 따라간 결과인 셈이다.
결국 자신의 욕망이 이야기를 똑똑하게 만든 셈일까. (웃음)
욕망이 사람을 똑똑히 만든다. (웃음) 어쨌든 이야기를 전진시키고 싶은 내 욕망이 수를 써내게 하더라.
그런데 여러 가지 음식이 정말 많은데 왜 자장면이었을까. 자장면이 어디든 배달되는 음식이기 때문이었을까.
내가 자장면을 원하니까, 내 욕망이 진짜 자장면을 먹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자장면을 통해 이야기를 진전시키다 보니까 배달도 할 수 있겠다 싶었던 거고. 그냥 정말 발상의 진전대로 이야기를 쓴 거다. 이야기가 가는 대로 따라갔다. 예를 들면 김씨가 자장면을 먹고 싶어서 면을 어떻게 만들까 고민할 때 김씨가 한동안 방법을 못 찾을 땐 나도 방법을 못 찾았다. 이야기를 한달 동안 쓰지 못했다. 자장면이 먹고 싶은데 면을 어떻게 만드나, 미치겠네. 이런 김씨의 고민이 곧 나의 고민이었다. 그러다가 김씨가 우연히 새똥을 발견한 것처럼 나도 어느 순간 ‘똥이다!’라고 외치듯이 방법을 떠올렸고, 다시 이야기를 진전시켜서 써나가기 시작했다. 딱히 어떤 계획적인 방식으로 써나간 건 아니었다.
‘농심’에서 협찬 받은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있던데. (웃음) 사실 그런 상표명을 가릴 때 뭔가 실제적인 상표명이나 상호가 주는 리얼리티가 훼손되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그게 참 억울한 측면인데 PPL은 고사하고 허가를 받아야 되는 입장이었거든. 어떤 영화인지도 모르는 영화에 자사의 대표적인 브랜드와 상표를 허가해줄 수 없다는 입장이더라. PPL얘기가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결국 허가까지 받아가면서 써야 했던 건 다들 그 짜파게티의 맛을 아니까, 그 즉물감을 무시하거나 포기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SK텔레콤’이라던지, ‘오뚜기’ 얼굴이라던지, ‘짜파게티’, 우리가 사는 공기 중의 일부분이라 말할 수 있는 그 물리감이 이야기를 받쳐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거지.
밤섬에서 김씨가 살아가는 모습은 인류의 진화 과정을 압축해놓은 것처럼 보인다. 수렵과 채취에서 사냥으로 이어지고, 결국 농경사회로 진입한다. 이런 과정의 설계도 역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방식 안에서 단계적으로 착안된 건가?
그건 약간 계획이 있었다. 애초에 이 이야기가 코미디를 빌려 쓴 인류학 보고서의 모양새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으니까. 왜냐면 김씨는 사회성을 다 내던지고 다시 밤섬에서 새롭게 사는 거니까 그러려면 자신만의 방식에서 비롯된 삶이 진화적 과정을 밟을 수 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지금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은유가 되길 바랬다. 작지만 다른 의미의 진화랄까. 먹을 것을 구하고, 욕망을 성취하고, 어떤 일에 보람을 느낀 다음의 욕망은 뭘까. 그 다음의 욕망은 결국 사람을 원하지 않을까. 이런 과정들이 일종의 진화에 가까운 은유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정도 예측은 있었다.
남자 김씨가 섬에 표류했을 때, 119에 신고하고 헤어진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구조를 요청한다. 부모나 가족에게 전화를 걸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내가 그래서 그럴까. 그것도 내 욕망인데, (웃음) 내가 만약 자살했다가 실패해서 밤섬에 떨어졌다면 가족한테 전화할 거 같진 않거든. 걱정도 되실 테고, 내가 자살을 포기한 상태도 아니니까. 그리고 애초에 가족을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그 상태로 거기에 있지도 않았겠지. 어쩌면 가족이 편한 상대가 아닐 수 있지 않나. 혹은 자신의 그런 상황을 알리고 싶은 상대가 아닐 수도 있고. 그러니까 타인인 119를 통해서 가장 먼저 시도해본 게 아닐까. 주변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게 119의 도움을 받고 밤섬에서 나가서 다시 자살을 시도해보자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가장 가까운 친구나 친척, 가족에게 자기가 자살했다는 사실이 까발려지는 건 불편하지 않나.
<천하장사 마돈나>에서도 동구가 여자가 되기 위해서 넘어야 할 마지막 허들은 아버지다. <김씨표류기>에서 남자 김씨의 유년시절이 잠시 등장하는 장면에서 아버지의 강압적인 모습이 등장하기도 하고 여자 김씨는 온전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같은 집에 사는 부모와 완전히 단절돼서 살아간다. 폐쇄적인 가족 구조가 <김씨표류기>에서도 은연중에 감지된다.
나에게 있어서 가족이란 그런 문제처럼 이해돼서 그런가 보다. 가깝지만 가깝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지긋지긋하게 계속 화해해야 되는 대상으로서의 존재가 아닐까. 내가 조금 비뚤어져서 그럴지도 모르고. (웃음)
<천하장사 마돈나>의 동구나 <김씨표류기>의 남자 김씨나 타인의 입장에서는 비극적이라 할만한 삶의 형태를 띠고 있다. 성소수자에 대해 관대하지 않은 사회에서 여자가 되고 싶은 소년이라던가, 경제적으로 벼랑 끝에 몰려 사회적 자살을 선택하는 남자니까. 하지만 정작 그 삶을 드러내는 방식은 비관과 거리가 멀다. 상황의 비극을 유희로 역전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건 아닌가. 예를 들면 자살하려는 상황에서 변의를 느낀다거나. (웃음)
인간의 삶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처럼 기본적으로 항상 하나만 있다고 생각하는 함정에 빠지지 말자고 다짐한다. 내 취향상 뭔가 하나의 감정을 100%로 얘기하는 것에 대해서 심한 거부감을 느끼는 부분이 있다. 감정이란 복잡한 문제를 싹 여과해서 어떤 감정에 100% 집중해서 이것만 보라고 하는 게 진심을 다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자가 슬프게 오열하는 가운데서도 똥이 마려울 수 있는 거 아닐까. 거부할 수 없는 똥. (웃음) 그 감정이 놓인 공간 안에 다른 사람들이 보면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수 있는 부분이 함께 있을 수 있는 셈이다. 그 장면에서 눈물 같은 설사라고 설명을 해서 배우가 기겁을 하긴 했는데, (웃음) 눈물보다 설사가 중요했고, 눈물보단 침이 더 중요했다. 며칠간 물을 못 먹다가 달콤한 액체를 삼키면서 입안에 도는 침이 그를 다시 살게 하는 거니까. 실제로 측면의 클로즈업으로 봐도 눈물은 없다. 콧물과 침, 설사, 이렇게 안에서 나올 수 있는 것들을 다 쏟아내고 다시 산다는 것에 주목한 장면이라서 눈물만 흐르는 장면과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겠지.
남자 김씨의 위생상태는 환경이 만들어 주는 불결함이지만 여자 김씨의 불결함은 선택에 가깝다. 결벽적인 인간으로 그려볼 생각은 없었을까.
여자가 무엇을 방치하고 무엇을 지키느냐라는 게 공간에서 확실히 대비되길 바랬다. 이 여자는 결벽증이 있다. 그런데 모든 사안에 관한 결벽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사에만 결벽이 있는 거다. 나에게도 그런 시점이 있는데 그러니까 자기에게 관심 없는 건 완전히 방치하고 자기가 매달리는 것들에 대해서만 맹목적인 습성을 보이는 여자의 절실한 상태를 보여주고자 했다. 방은 그렇게 어지럽지만 자판은 매일 청소하고, 쓰레기는 널브러져 있지만 그 가운데 가지런히 정리된 것들이 있고, 그런 풍경 속에서 본인의 입장과 태도, 감정을 설명해보려 했다. 계획적으로 삶을 방치하는 여자다. 삶을 방치하는 인간이지, 방치된 인간은 아니란 말이다. 어떻게 보면 주도 면밀하고 계획적이기까지 하다. 기본 생활을 방치할 뿐이지, 자신의 삶은 다른 방식으로 교묘하고 철두철미하게 관리한다.
여자 김씨가 너무 예쁜 거 아니냐는 지적도 있던데.
어느 선에 맞춰서 표현해야 할지, 예를 들면 상처의 크기는 어느 정도로 할까, 와 같이 관객과 내 입장 사이를 염두에 두는 모양새의 고민이 있었다. 히끼꼬모리가 왜 저렇게 예쁘냐, (웃음) 이런 얘기도 나올 수 있다는 걸 예측했지만 그 상황에서 적절한 예쁨이란 이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어떻게든 예쁘지 않게 보일 방법을 못 찾을 정도로 뭘 해놔도 여배우가 예쁘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웃음)
사루비아라던가, 민방위 훈련 같은 과거적인 이미지가 등장한다. 반대로 로그인이라던가, 젊은 세대와 소통이 용이한 용어들도 함께 등장하고. 시대적 정서가 먼 용어들이 공존하는 느낌이다. 현대적인 스타일을 두르고 있음에도 과거지향적인 감성을 지녔다고 할까.
이 단순한 구조의 이야기가 훨씬 다양하고 입체적이고 풍부했으면 좋겠다는 작가적 욕망이 있었다. 단순한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내내 그런 단순함을 느끼지 못하게끔 다층적이길 바라는 욕심이 있었다. 본질적으로 대비되는 요소들이 여기저기서 툭툭 나오는 건 그 때문이다.
태풍으로 인해 섬이 황폐화되는 장면은 <김씨표류기>에서 유일하게 영화의 비극적 감정이 직설적으로 노출하는 부분이다. 캐릭터에겐 가장 가혹한 순간이기도 하고.
태풍은 한국에 살면서 겪어야 할 과정이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사전조사를 해보니까 밤섬에 태풍이 지나가고 난 후에 보통 공익근무요원과 해병전우회 분들이 정화작업을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런 사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까 이 사람이 지금까지 끌고 온 이야기와 충돌되는 요소가 있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쓰다 보니까 맞닿은 지점이 있었던 데다가 일종의 이격화 같은 게 필요했다. 밤섬은 김씨의 왕국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 싸늘한 시선으로 보자면 아무것도 아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김씨의 왕국과 성취감에 감동하고, 김씨의 고군분투를 응원하듯 지켜보는 가운데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게 차가운 현실이 휙 다가왔을 때 갑작스럽게 냉정한 현실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걸 좀 보여주고 싶었다.
고립을 선택한 인물의 삶을 응원하게 만들다가도 결과적으론 그 고립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 고립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 고립에서 인물이 벗어나는 장면을 위한 영화처럼 보인다.
그런 마음으로 썼다. 남자는 자장면이 희망이라고 얘기했지만 자장면을 다 먹은 다음엔 어떡하나. 결국 희망은 자장면이 아니라 사람한테 있는 거 아닌가. 결국 지치고 힘들게 볶는 관계라 할지라도 결국 사람간의 관계에서 풀고 발견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아는 한 그 방법 밖에 없다는 걸 김씨가 알아가는 과정일 수 있겠지.
<천하장사 마돈나>에서도 그렇고 <김씨표류기> 역시 주인공의 미래가 드러나지 않는 영화다. 사실 두 김씨 남녀의 만남이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그 이후에 두 사람의 삶이 더 비참해졌을지 모를 일이다.
김지운 감독님이 영화 보시고 나서 말씀하시더라. “너무 멋 부린 결말 아니야?” (웃음) 자기는 좋지만 관객들은 뭔가 후일담을 더 원할 거 같고, 그에 대해서 더 친절한 결말을 보여줘야 되는 게 아니냐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에도 동의하는 바가 있다. 하지만 거기에 동의하냐 마냐에 상관없이 나는 그 다음을 보여줄 엄두가 안 났다. 둘이 행복하게 살길 바라지만 앞으로 닥쳐질 삶이 마냥 행복할지, 아니면 어려울지 모른다. 아니면 마냥 행복하다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려나. 쉽지도 만만치도 않은 앞길을 남겨두고 끝내는 게 나에게 있어서 최선의 책임이었다. 내 마음에서 보자면 그 이후에 둘이 버스에서 내려서 손을 잡고 자장면을 먹으러 가는 건데 뭔가 한쪽으로 너무 치우친 규정 같아서 꼭 그렇게까지 한쪽으로만 볼 수 없는 미래가 펼쳐지는 걸로 그냥 남겨두는 게 낫겠다 싶었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마치 캐릭터의 조물주나 다름없는 창작자가 그 삶에 관여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창작자라고 해서 내가 한 사람을 단정하고 규정하는 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봤다. 비단 결말 이후의 얘기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시작도 그렇다. 남자는 최소한 빚이 있어서 자살하려는 건지 알지만 저 여자는 왜 벽장에 틀어박혀 있는지 알 수 없다. 인물의 전사에 대해서 얘기할 수 없었던 것도 이 사람들에게 사실 이런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히끼꼬모리가 됐고, 자살을 선택했다는 단정을 할 자격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적어도 이 이야기가 그런 방식의 이야기가 되지 않았으면 했다. 대신 두 사람의 현재를 다루는데 있어서 현실의 공기를 충실하게 다룸으로서 각자의 바람대로 두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유추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게 내가 짊어진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천하장사 마돈나>같은 경우는 에필로그라도 있어서 최소한 그 인물에 대한 희망이 감지되는 지점이 있지만 <김씨표류기>는 그냥 두 사람의 만남과 동시에 이야기가 끝난다. 어떻게 보자면 동구에 비해 남녀 김씨의 미래에 긍정적인 힘을 실어줄 필요가 없다고 느꼈던 건 아닐까.
동구는 어리기도 하고, 혼자 헤쳐나가야 하니까. 일단 두 사람의 맞잡은 손만한 게 없겠다는 생각도 했고. 앞으로 어려움도 있겠지만 두 사람이 손을 잡은 채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 사실 그 인서트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처음 계획은 남자 김씨의 얼굴로 시작해서 다시 남자 김씨의 얼굴로 끝내는 거였다. ‘클로즈업된 남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미소가 점점 퍼지기 시작하고 그 미소가 더 퍼지다가 가차없이 암전되면서 경쾌한 음악이 흐른다.’ 이게 원래 시나리오 문구였는데 영화를 찍는 순간 그렇게 끝내선 안되겠다는 걸 알게 됐다. 두 사람을 한 화면에 담은 투샷에서 끝내야겠더라. 두 사람이 쏟은 애정을 생각하면 두 사람을 한 화면에 담지도 못하고, 손 한번 잡지도 못한 상태에서 끝내는 건 할 수 없겠더라고. 찍는 도중에 거기서 조금 더 가는 결말로 약간 수정했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바라보는 투샷이 우리가 낼 수 있는 결말이란 걸 느꼈지.
<김씨표류기>는 일말의 희망을 찾아가는 두 인물의 연대를 통해서 관객에게도 모종의 희망을 전하는 영화다. 그렇다면 본인 스스로에게도 이 영화가 어떤 희망이라 할 수 있나?
내가 사실 그렇게 희망적이거나 낙관적인 인물은 못 된다. 그래서 희망을 더 갈구하고 얘기하는 것일 수 있겠다. 사실 나나 가족이나 친구들이나 어려운 소리만 하고, 희망이 희망처럼 들리지 않는 요즘이니까 나와 그런 사람들이 조금 더 용기를 내고 삶의 즐거움을 찾아가는 방법을 알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희망 얘기하니까 갑자기 내 자신이 턱 막히는데. (웃음)
결국 영화가 자신의 갈증을 해갈하는 도구가 되는 셈이다.
나는 어떤 이야기든 시나리오가 유머스러웠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있지만 내 자신은 그렇게 유머러스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갈증과 욕구들을 작품을 통해서 찾으려 하는 거 같다.
자신이 생각했던 3~4개의 구상 가운데 <김씨표류기>가 가장 비대중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고 하던데, 아이러니하지만 가장 어렵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해야겠다는 용기를 얻게 된 계기는 엉뚱하게도 파울로 코엘류의 ‘오, 자히르’라는 소설 덕분이다. 거기서 남자 주인공이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가 열차의 선로를 보면서 저 열차의 선로 간격이 과연 몇 미터일지 갑자기 궁금해하다가 역무원에게 물어본다. “저 열차의 선로 간격이 얼마나 되죠?” 역무원이 자신있게 143.5cm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왜 열차 선로가 143.5cm인지 궁금해서 다시 물어보니까 그건 기차 폭에 맞춘 거라고 답한다. 그럼 왜 기차 폭이 그렇게 된 거냐고 묻자 역무원이 드디어 짜증을 낸다. 결국 집에 돌아오는데 그 궁금증이 계속 되니까 관련 자료를 찾아보게 된 거다. 찾아보니까 그게 중세 마차의 바퀴 폭이란 걸 알게 된다. 중세 마차와 이 열차의 메카니즘엔 하등의 관계가 없는데 불구하고 마차의 폭이 143.5cm라서 기차의 폭이 143.5cm인 거다. 그럼 왜 마차 폭이 그런 걸까 찾아보니 그건 더 거슬러 올라가서 로마시대까지 닿는다. 로마시대에 말 세필이 끄는 마차가 있는데 말 세필을 일렬로 세우면 폭이 그 정도가 되는 거다. 그러니까 로마시대 말 세필로부터 만들어진 메카니즘이 열차를, 선로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거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지금 로켓의 연료통 모양과 설계도 거기서 출발한다. 로켓의 연료통을 나사에서 출발대까지 기차로 옮겨야 되니까 그걸 기차 폭에 맞게끔 길게 제작된 거다. 로마시대의 메카니즘이 로켓으로 이어진 거다. 뭔가 대단한 메커니즘처럼 보이지만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올 수 있는 일이지. 결국 그게 그냥 부지불식간에 무의식적으로 로켓까지 규정해버리는 우스꽝스런 내용을 전하는 내용이 있다.
거기서 무슨 용기를 얻었다는 건가?
상업적이다, 비상업적이다, 라는 구분이 나에게 143.5cm의 허울처럼 보였다. 상업영화라는 메커니즘은 사실 할리우드가 백여 년 만에 만들어낸 것일 뿐인데, 이걸 믿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이걸 근거로 삼을만한 것인지 헷갈리더라. 맹신해야 되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요즘 시스템이 우울한 건 창작자로서도 스스로 과연 이게 상업적으로 될까라는 생각에 얽매여야 한다는 거다. 지금 시스템은 영화 한편 찍어서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하면 다시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장될 수 있는 각박하다. 내가 생각하는 여러 모양의 영화를 여러 루트로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이 확보된 게 아니라 지금처럼 몇 개의 투자사와 제작사가 산업적으로 차지하는 파이가 큰 상황에서 거기서 143.5cm같은 허울 같은 근거를 제시하면서 이대로 찍어야 관객이 좋아하는 거라고 요구하는 것들을 스스로의 고민을 포기한 채 수용해야 하는 건가 싶을 때가 있으니까. 자기가 생각하는 걸 온전히 지키고 표현하는 감독들은 이런 상황에서 몇이나 될까. 물론 관객이 즐겁게 보길 바라지만 관객이 즐겁게 보는 영화의 공식은 누가 무슨 근거로 쥐고 있는 건지, 우린 왜 거기에 따라가야 하는 건지, 그런 고민을 부르는 지점이 있다.
어쨌든 공동작업이었던 전작과 달리 개인으로서 이름을 올린 첫 작품인 만큼 의미가 남았을 텐데.
다른 건 모르겠고 이런 거 하나는 있는 거 같다. 언젠가 해영이도 똑같이 느낄 건데 사실 이런 영화를 만드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 설득이다. 아무리 힘들고 지난해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설득하고 설득 당하는 과정 속에서 좋은 작품이 나온다. 그래서 그 끈을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둘이서 작업할 때는 그 과정을 우리끼리만 한 거 같다. 그게 한편으로 좋고, 장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대부분을 우리 안에서 만족하고 끝내버리면 다른 스태프들이나 배우들과 나누는 과정에서 아무래도 소홀함이 발생할 수도 있다. 어쨌건 나는 그 대상들과 다 함께 소통해야 되는데 두 사람의 소통이 너무 강력하니까 이미 설득의 과정을 둘에서만 해소하게 된다. 이번 영화는 어쨌거나 편한 설득의 대상이 없지만 그렇다고 그걸 내가 안 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 노력을 배우와 스태프들과 나누게 됐다. 덕분에 영화를 찍는 과정이 이래야 되는 거라는 걸 느꼈다. 그리고 둘이나 하나나 외롭긴 매한가지더라.
아무래도 혼자가 됐다는 게 오히려 더 열릴 수 있는 계기가 됐나 보다.
그전엔 감독의 고민은 감독들끼리 알아서 하고 있을 거라고 느꼈다. 지금은 감독의 고민과 방향에 대해 스태프들이나 배우들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어느 지점까지 가고 있는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어느 지점을 향해서 가고 있는지, 이런 걸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걸 조금이나마 어렴풋이 알게 된 거지.
강우석 감독이 제작에 관여했다. 사실 강우석 감독은 상업적인 마인드가 강한 감독이다. 반면 <김씨표류기>는 실험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영화다. 그런 점에서 강우석 감독의 선택을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아까 그 143.5cm의 허울을 근거라고 계속 제시하는 제작사 틈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아이템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우석 감독님은 투자자이기 전에 선배감독님이기 때문에 이야기나 영화 본연의 재미를 봐주셔서 투자가 이뤄지고 제작이 가능해진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사실 믹싱 때 즈음 내가 오히려 배우와 흥행의 압박을 느끼고 원래 계획되지 않았던 것 가운데 더 해볼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음향적인 뭔가를 더 추가했었다. 그런데 그걸 딱 보시더니 영화 잘 만들어놓고 너무 쓸데없는 요소를 많이 넣었다고, 왜 코미디의 품위를 스스로 떨어뜨리냐고 하시더라. 개봉 직전에 코미디의 품위를 말할 수 있는 한국의 유일한 투자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어떤 투자자와 과연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정말 많은 용기가 됐다.
<김씨표류기>외에 영화화를 생각하는 다른 이야기가 3개 정도 더 있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이야기였을까.
시나리오도 아니고, 시놉시스가 있었던 것도 아닌 구상 단계라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만한 건 아니다. 다만 앞으로도 좀 다양하고 많은 걸 해보고 싶다. 지금 슬슬 너무 아기자기하고 영화의 묵직한 힘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듣고 있는데 덕분에 콤플렉스 같은 것도 쌓이기 시작했다. 직업감독으로서,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판단의 요구를 받게 될 때가 온 거 같다. 뭔가 다른 걸 할 수 있는 감독으로 정형이 되야 할 시점이다.
<천하장사 마돈나>나 <김씨표류기>와 전혀 다른 영화에 도전해야겠다는 건가?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직업감독으로서 ‘이런 건 못하잖아’, 아니면 ‘계속 또 그것만 해’, 그런 시점들이 생길 거다. 내가 작가가 아니라 직업감독으로서 영화 일을 하고 싶은 만큼 어떤 프로젝트든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시킬 수 있는 직업적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조금 다른 방식의 경험도 해봐야 될 거다. 나도 진화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천하장사 마돈나>에 소재의 제한이 있었다면 <김씨표류기>는 형식의 제한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계속 왜 이렇게 제한을 두고 할까, 이런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 없이 애초에 남들이 다 좋아할만한 요소를 갖고 남들이 다 좋아할만한 즐거움이 담겨있는 영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욕망도 한편에 있다. 내가 아까 말하지 못했던 구상 가운데 몇 가지는 더 말도 안 되는 제한 속에 놓여있거나 더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이야기들도 있다. 예전에 재영 선배와 우리 김정수 촬영감독과 술 마시면서 그런 아이템을 잠깐 얘기했더니 쌍수를 들고 반대하더라. (웃음) 물론 일종의 오기도 있다. 앞으로 점차 넓혀지겠지, 라고 남들이 생각한다면 오히려 청개구리처럼 나는 조금 더 안으로 파고 들어갈만한 무지막지한 아이템들을 꺼낼 수도 있거든. 일단 두고 보면서 내가 뭘 할 수 있는 인간인지 더 살펴봐야겠다.
글: 민용준 기자
Movist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