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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 날
“하하하하... 나비도 속았어요, 속았어.
우리 빈궁 자수 솜씨가 얼마나 훌륭하면 나비도 진짜 모란꽃인 줄 알아요.”
그녀의 자수 솜씨가 마마의 것으로 둔갑한지 오래지만
부용은 오늘따라 영견에 대한 저하의 감탄이 마마를 향하는 것에 대한 서운함 때문에
밤새 수를 놓느라 뻐근해진 눈과 어깨가 더욱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빈궁마마의 전갈은 언제나 급하게 전해졌고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요구하는 대로 맞추어야 하는 것이었다.
왜 갑자기 꽃과 나비를 수놓은 영견이 필요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저하께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생긴 건 좋은 일이기도 했다.
영견만을 전하고 돌아가려한 부용을 기다리게 한 빈궁마마는 한식경 후 쯤 그녀에게 후원으로 오라는 전갈을 보냈다.
때는 오월...
활짝 핀 모란으로 인해 더욱 화사한 후원에서 저하와 빈궁마마는 다정하게 꽃놀이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는 저하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늠름하고 아름다워 부용은 절로 가슴이 설레였다.
저하를 볼 때마다 어쩔 수 없는 그녀의 설레임은 언제나 불충이었다.
그런 그녀의 설레임이 드러날까 봐 조심스럽게 눈을 내리깔고는
빈궁마마가 새로 지어 보내준 당의의 조금 긴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며 조심조심 후원으로 들어선 참이었다.
저하의 영견에 대한 칭찬이 계속되고 있었다.
“나비가 진짜 살아 날아갈 듯해요. 아...차오르는 정취를 막을 길이 없구나."
牡丹含露眞珠顆(모란함로진주과) 진주 이슬 머금은 모란꽃을
美人折得窓前過(미인절득창전과) 신부가 꺾어들고 창밖을 지나다가...
저하가 영견으로 인해 더욱 커진 정취를 이기지 못하고 읊으시는 시는
신혼 부부의 토닥거리는 고운 사랑 싸움을 담은 이규보의 절화행(折花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하는 마마께 화답을 청했다. 이 봄 날, 화사하게 아름다운 두 사람에게 꼭 어울리는 싯구였다.
“빈궁 화답해주셔야죠.”
당황하며 그녀에게 눈짓을 주는 마마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신 답하는 싯구...
혼자 읽을 때마다 마냥 설레이다 못해 얼굴이 붉어지던 부용은
행여 얼굴이 붉어질까봐 조심스러워하며 저하가 읊은 다음 부분을 읊조렸다.
含笑問檀郞(함소문단랑) 살짝 미소띄고 신랑에게 묻기를
花强妾貌强(화강첩모강) 꽃이 예쁜가요 제가 예쁜가요.
“어허... 처제의 화답인가?”
놀라며 그녀를 향해 돌아서 가까이 다가오는 저하는
싯구놀이를 이어가는 기쁨에 겨워하며 다음 부분을 그 좋은 목소리로 낭랑하게 읊었다.
檀郞故相戱(단랑고상희) 신랑이 짐짓 장난을 치느라
强道花枝好(강도화지호) 꽃이 당신보다 더 예쁘군요
그녀 또한 주고 받는 싯구놀이에 빠져 장난인 줄 알면서도 꽃에게조차 질투가 나 토라진 신부라도 되는 양
다음 부분을 읊조렸다.
美人妬花勝(미인투화승) 신부는 꽃이 더 예쁘다는 말에 토라져
踏破花枝道(답파화지도) 꽃가지를 밟아 뭉개고 말하기를
저하는 재미난 듯 신이 나서 웃으며 마지막 구절을 읊었다.
花若勝於妾(화약승어첩) 꽃이 저보다 어여쁘거든
今宵花同宿(금소화동숙) 오늘 밤은 꽃하고 주무세요.
그녀 또한 그가 대신 읊어주는 토라진 신부의 마음에 빙의라도 된 듯 슬며시 웃음이 함께 나고 있었다.
“혼인도 안한 처제가 어찌 이런 얄궂은 시를 입에 올리는가?"
하지만 살짝 톤이 낮고 강해진 저하의 다음 말에 정신이 번쩍 나고 말았다.
"황공하옵니다. 저하. 미천하여 부덕을 모르옵니다. 벌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껄껄 웃으며 더욱 신이 나는 저하였다.
"하하하... 농이야, 농. 처제를 놀리면 재미나단 말이야. 하하하"
매번 그녀를 놀리는 저하였지만
부용은 그런 저하의 농에 매번 그저 속마음을 들킨 양 화들짝 놀라고 마는 자신이 한심하기만 했다.
마마의 요청으로 부용지로 향하는 길에 계속 무엇엔가 골몰하던 저하는 갑자기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처제. 내가 수수께끼를 또 하나 만들었단 말이지.”
늘 수수께끼 내기를 좋아하는 저하였다.
“이번에는 절대로 쉽게 풀지 못할 것이야.
이틀 안에 답을 가져오면 내 큰 상을 내릴 것이야 알겠지, 처제?"
그리고 그 수수께끼를 풀어오면 급 약이 오르면서도 다음 수수께끼를 내느라 더욱 신이 나는 저하이기도 했다.
“예, 저하...” 부용도 기대가 되었다.
저하는 마치 장난꾸러기같은 표정으로 웃으며 수수께끼를 말하였다.
“살아도 죽고 죽어도 사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도 죽고 죽어도 사는 것...”
장난스럽게 말하는 저하의 수수께끼를 따라 되뇌이며 웃었지만 부용은 왠지 모르게 가슴 한 켠에서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저하는 돌아서며 마마에게도 물어보았다.
“빈궁은 수수께끼를 알겠어요?”
“아... 알듯 모를 듯 하옵니다. 저하...”
“빈궁은 모를 것이요, 빈궁은 몰라요...”
수수께끼를 알아도 몰라도 함께 하는 모습만으로도 아름다운 두 사람이 그녀 앞에서 파란 봄 하늘처럼 맑게 웃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부용의 가슴이 자꾸만 아파왔다. 그리고 눈 앞이 흐려지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아파지는 마음...
멀어지면 멀어져서 허전한 마음...
“처제, 벌써부터 수수께끼 풀고 있는 건가? 어여 이리 오지 않구?”
멀리서 들리는 저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부용은 넋을 놓고 걸음을 옮기다 그만 치맛자락을 밟고 넘어지고 말았다.
“아앗~”
내관들과 저하 앞에서 이 무슨 망신....
부용은 참았던 눈물이 마냥 흘러내리고 말았다.
그 날...
아버지의 서찰과 오빠의 분통을 전하기 위해 다음날 다시 궁으로 가야하는 부용은
지난 밤 다시 수놓은 영견을 챙기고는 당의를 입으며 오늘은 정말 정신차려 조심할 것이라 다짐했다.
일전에 궁에 들렀을 때 마마가 지어주겠다며 이리저리 재고 맞추었던 당의는
막상 보내진 옷을 입어보니 치마 길이가 조금 길었다.
애써 지어주신 당의를 고치거나 차려입지 않는 것은 불충이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넘어지지 않도록 치마를 살짝 들어올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어제는 저하 부르는 소리에 눈물을 감추느라 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바람에 치맛단 잡는 걸 잊어버려
저하와 마마, 그리고 여러 상궁 내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차라리 넘어진 것이 낫기도 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흘리는 눈물이 넘어져 아픈 눈물, 넘어져 창피한 눈물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챙피하여 저하는 쳐다보지도 못했고 걱정해주는 모두의 눈길에는 그저 미안하기만 했다.
하지만 ‘조심하지 않구...’라는 말로는 감추어지지 않는 미소 때문에 일그러지고 있던 마마의 얼굴....
부용은 후우...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from d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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