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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ly posted by lwang at 2004-11-14 08:57 PM:
KITTY,
你的那个网址里的投票不是很有意思,它是说" 下面四个剧人物,谁的爱给人最不好的感觉?"
那还用问,当然是老韩演的那个粗暴而自私的男人李基熏啦.( 哈哈,想不到是这么个投票吧?)
当然想不到。让好好先生演出坏男人就是大反转啦。
这么说成贤儿的角色是最可怜的。她得票最少。
这有篇2。0的鸟语。你给参透出来。
제목: [주홍글씨] - 트렁크 안에 갇힌 낭만주의자들
조회: 786 백승광 / 2004.10.31 오후 7:57:15
(스포일러 무진장 포함)
주홍글씨
한국관객들은 고어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피터잭슨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수백만명을 동원하며 승승장구해도, 그의 진짜 걸작인 데드 얼라이브는 사지절단되어 비디오로 출시됐을 뿐 아직도 영화관에서 볼 수 없다. 미이케 다카시의 가장 소프트한 착신아리가 개봉되기는 했지만, 그의 진짜배기인 이찌더킬러, 오디션, 극도공포대극장우두, 비지터 큐는 극장 개봉이 영원히 불가능해 보인다.
작년인가, 딴지일보에 꼭도라는 분께서 고어영화 예찬글을 쓰신적이 있는데 그 글 아래 무수히 달렸던 네티즌들의 악플들이 기억난다. 저런 피범벅 영화를 좋아하는 놈들은 정신이 약간 이상하거나 흉악범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놈들이니 경계해야 한다나.. 가끔 살인범들이 경찰에 잡혔을때 최근에 재밌게 본 영화가 뭐냐고 물었을때 "해리포터"라고 말하면 기사에 실리지 않고, "나쁜남자"라고 말하면 영화가 사람을 저렇게 만들었다는 그럴듯한 심리학 리포트가 하나 완성되는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지루하게 늘어놓는것은, [주홍글씨]가 너무 더럽고 역겹고 구역질나서 영화 전체가 다 싫어졌다라고 말하는 분들의 글을 보고 하는 이야기다. 나는 그 분들이 잘 못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면 사람들의 취향의 잘잘못은 없기 때문이다. 고어영화가 싫은 것은 그 사람 취향이고, 고어영화가 좋은 것은 또 그 사람 취향이다. 서로의 취향을 방해하지만 않으면 그것은 괜찮은거다.
난 [주홍글씨]에 그 악명높은 트렁크 신이 없었다면, 이 영화에 대해 혹평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대보다는 별루다라고 말했을거다. 그러나 트렁크 신이 날 웃게 해줬다. 물론 끔찍했다. 마지막에 떡복이가 되서 나오는 한석규를 보고 허걱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찝찝한 감정을 미학으로 받아들이냐 아니냐의 차이에서 영화에 대한 서로다른 평가가 나오는것 같다. 나는 그걸 미학으로 받아들여서 기분이 좋았으나, 아마 상당수 분들은 2시간 넘는 여가시간을 망춰논 멋같은 장면일 수도 있다.
트렁크 신이 가지는 의미는 2시간 내내 평이하게 흘러가던 영화를 끝내기위해 정신적 쇼크를 줌으로써 관객들의 시선을 단번에 환기시키려는 그런 계산도 분명 있었을 거다. 그러나 그건 대다수의 영화가 당연히 가지고 가야 하는 기승전결식 구조이지 이 영화만의 특징은 아니다. 문제는 그 충격이라는 것이 단순히 전기적 쇼크만으로 끝나느냐, 전체 영화의 의미적 완결성까지 가져오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난 형식미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그 장면은 아주 적절해보였다고 생각하고 아주 맘에 들었다.
영화의 주제를 가지고 많이 이야기하는데, 가장 큰 오해중 하나는 이 영화를 [바람피는 놈년들은 다 죽어야해]라는 식의 권선징악 드라마로 읽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해석해버리면 이 영화 헛거 본거다. 아니 그런식으로 보면 트렁크 신은 정말 도덕적으로 역겨운 장면일 수 밖에 없다. [해피엔드]를 찍을때 최민식이 제발 마지막 살해신은 상상신으로 처리하자고 우긴것도 그런 도덕적 교훈에 대한 관객들의 비판을 미리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홍글씨]는 그런 교훈에는 관심이 없다.
영화 시작할때 나오는 성경구절의 핵심어는 결국 "욕망"과 "대가"다. 여기서의 "대가"를 트렁크에서 피범벅되어 죽어가는 그런 결론상의 대가라고 생각하지 말자. 영화의 핵심 주제를 억지로 요약하자면, "욕망은 항상 대가가 있기 때문에 책임을 가져야 한다"라는 것이리라. 여기서 욕망이란 단어를 살짝 사랑으로 바꿔도 될 것 같다. 사랑은 다 댓가가 있다. 사랑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남녀는 무언가를 바쳐야 한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희생해야 한다.
트렁크에서 같힌 남녀는 처음에는 그 상황을 유희로 즐긴다. 그러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무도 구해주러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이 나기 시작하자 두 사람의 로맨스는 막을 내린다. 먼저 정신을 차리는것은 한석규다. 한석규는 자신에게 기대는 이은주에게 "손좀 치워줄래?"라고 냉정하게 말한다. 죽음을 앞에 두고 사랑이니 뭐니 그딴거 없다. 당장 죽게 생겼는데 무슨 사랑의 밀어인가..
이은주가 혼자 로맨스에 빠져 "난 외국 가서 자식 낳고, 이름을 펄(진주)라고 지을거야"라고 읇조리자 한석규는 귀찮아서 못 들어주겠다는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다. 나중에는 씨발년 어쩌면서 소리까지 빽빽 지른다. 화가 나서 총구리를 대기도 한다. 사랑때문에 모든걸 다 바칠듯 열정적인 섹스를 나누던 남녀는 죽음이 눈앞에 오자 그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나약한 육신으로 추락한다. 마지막에 구출될 당시의 한석규의 누드는 인간이란 존재의 초라한 육신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영화에서 한석규와 이은주가 아내와 친구를 배신하고 애정행각을 벌이는 이유는 바로 "사랑" 때문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시켜 주는 절대가치다. 그들은 섹스를 나눌때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심지어 마음을 놔두고 가라며 떼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두사람의 사랑을 나타내는 장면은 오직 섹스신 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섹스신이 계속 등장하는 것은 결국 사랑은 섹스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감독의 조크이기도 하다. 근데 조크가 좀 심각하다.
두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간통을 하는 자신들을 정당화하기에 바쁘다. 마치 아주 떳떳한 행동을 하는것으로 보여지지만 두 사람은 전화도 몰래 해야하고, 섹스도 숨어서 해야하며, 밖에서는 서로 모른채 해야 한다. 그리고 애를 베도 어떻게 처리해야하나 망설이게 된다. 사랑은 불륜의 정당화를 제공하지만, 신체적인 불편함까지 없애주는 것은 아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괜찮은거냐라고 묻는 성현아의 마지막 한마디는 그래서 명대사인 것이다. 사랑만 하면 다 잘 될까?
이 영화에서 왜 사진관 여자의 스토리 (원작으로도 별개의 작품)를 굳이 포함시켰냐는 의견들이 많다. 그 이야기빼면 영화가 훨씬 간소해졌을 것 같다. 그러나, 사진관 이야기는 영화의 중심내용과 결국은 같은 이야기다. 결혼한 유부가 바람이 나고 그래서 그것이 파멸을 만들어낸다. 살인동기는 무엇인가? 결국은 사랑이다. 아니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욕망이다. 한석규가 바라본 사진관 여자는 결국 자신의 모습이고, 그녀를 해석해가는 과정은 자신의 정체를 조금씩 드러내는 것과 같은 구조다.
성현아는 사진찍는 남자를 변태로 몰아간다. 반면에 사진찍는 남자는 성현아를 색녀로 몰아간다. 두 사람의 진술 중 어느것이 진짜고 가짜일까. 하지만 이 영화는 추리소설이 아니다. 결국 둘 다 살인사건이 나타나자 서로를 부정하기에 바쁘며, 서로에게 살인죄를 떠넘기기에 바쁘다. 중요한 건 성현아와 남자는 살인을 공모하지는 않았다는 거다. 그럼 성현아는 왜 남자의 머리를 성모상으로 깨부서버린 것일까? 이 줄거리를 제대로 이해못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래서 좀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성현아는 콩나물 사고 들어온 집에 남편이 죽어있자 그의 정부가 살해한것이라고 생각하고 바닥에 주저않는다. 결국 일이 이렇게까지 커졌구나하고 겁이 났던거다. 이때 남자가 눈을 뜨자 다시 살아난 남편의 복수가 무서워 확인사살을 한다. 그리고는 자신을 위해 남편을 죽였다고 생각한 그 사진찍는 남자가 증오스럽고, 그래서 그를 감옥에 넣기 위해 한석규 앞에서 그에게 불리하도록 진술을 한다.
사진찍는 남자는 난데없이 형사가 성현아 남편의 살인 이야기를 하자 당황한다. 이 여자가 결국 일을 냈구나하고. 괜히 아무짓도 안한 나까지 살인 공모죄를 덮어쓸 위험이 있자 그녀가 혼자서 벌인 살인극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녀를 색녀로 몰기 시작한다. 결국 성현아와 그녀의 정부는 서로가 서로를 배신한 셈이다. 첨에는 남편때문에 몰래 몰래 사랑을 했던 두 사람이 남편이 정말로 사라져주자, 서로를 증오하고 경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감정인 거다.
(ps. 사진관 살인사건은 원작과 조금 스토리가 바꼈다. 그것은 주홍글씨 영화 전체에 더 잘 맞춰지도록 조금 각색을 했기 때문이다. 변혁이 참조한 영화는 내가 장담하건데, 코헨형제의 [분노의 저격자]다. 거기서도 바람난 아내와 정부가 남편이 엉뚱한 놈에게 죽자 둘이 서로가 서로를 의심한다.)
마지막에 레즈비언 이야기가 나오는 것에 대해 너무 생뚱맞은 반전 아니냐는 반응도 많다. 근데 요즘 영화보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무슨 새로운 사실만 터져나오면 다 식스센스 생각을 하는것 같다. 그래서 올드보이때도 반전이 약하다는 이유로 영화를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반전은 중요한게 아니다. 중요한 건 한석규가 그토록 믿어오던, 즉 자신에게 헌신적이고 참하기만한 착한 아내조차도 스스로의 욕망때문에 친구의 애인을 빼앗아버리는 무서운 여자임이 폭로된다는데에 있다.
이 영화는 로맨스를 트렁크에 가두고 질식사시키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즉 사랑이라는 절대가치를 숭배하며 온갖 예술적 장르속에 죄다 사랑이야기만 늘어놓는 낭만주의적인 세계관을 경멸하는 영화다. 사랑을 믿느냐 안 믿느냐는 종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도덕의 문제이고 정치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를 혹은 무엇을 얼마만큼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런데 그런 사랑은 모두 책임이 뒤따른 다는 셈이다. 즉 댓가를 치뤄야 한다.
이 영화가 관객들을 불편하게 하는 이유중 하나는, 영화관은 남녀가 손 붙잡고 자신들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여행지로 들르는 곳일 수도 있는데, 이 영화는 그런 관객들에게 "꿈깨. 사랑하면 다 괜찮은거야? 응 그런거야?"라고 비아냥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보고 나서 뭐 이따위 영화가 다 있다고 기분 나뻐할 관객들도 많다고 본다. 하지만 사랑에 책임감이 따른다는 교훈이 사랑교 신도들에게 뭐 대단히 걸림돌이 될 것 같진 않다. 적어도 트렁크안에서 떡복이가 되지는 않을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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