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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6 金武烈<最终兵器:弓>专访
FR:http://ntn.seoul.co.kr/?c=news&m=view&idx=106236
김무열 "옥주현-문채원, 친해지고 싶었는데…" (인터뷰)
[서울신문NTN 임재훈 기자] 배우 김무열의 한자 이름은 무사 무(武)와 세찰 열(烈)이다. 무협 소설에서 한 번쯤 봤음직한 작명이다. 일제시대 독립 투사였던 친할아버지가 지어준 본명이라는 사실마저 소설처럼 느껴진다.
올해로 연기 경력 10년째를 맞은 서른 살 김무열은 이름값을 하는 배우다. 그동안 뮤지컬 연극 TV 영화를 종횡무진하며 자신만의 연기 내공을 쌓아왔다. 그의 미니홈피 메인 화면을 장식하고 있는 初心(초심)이라는 한자 역시 인상적이다.
그는 현재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연습이 한창이다. 얼마 전 촬영을 마친 영화 ‘최종병기 활’ 이후 숨가쁘게 차기작을 결정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각각 내달 2일과 11일에 차례로 선을 보인다.
단련을 멈추지 않는 무사 같은 배우. 그런 김무열의 갑옷을 벗겨보고 싶었다. 그 속에는 거친 사내가 아니라 부드러운 소년이 숨어 있었다.
# “옥주현 누나와 친해지고 싶지만…”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1951년 초연된 ‘아가씨와 건달들’은 이미 국내에서도 여러 번 리메이크됐다. 이번 2011년 버전에는 김무열을 비롯해 가수 겸 뮤지컬배우 옥주현, 배우 겸 현대무용가 이용우, 배우 진구 등이 캐스팅됐다. 김무열은 이들과 함께한 데 대해 반가움 반, 걱정 반의 소감을 전했다.
“진구와는 예전에 배우 박희순 형의 소개로 사석에서 만난 적이 있어요. 이번 작품을 통해 가장 친해질 것으로 기대되는 사람이죠. 이용우 형은 워낙 무용 쪽에서 유명하기 때문에 춤과 관련해서 배울 점이 정말 많아요. 문제는 옥주현 누나인데, 제가 여자 분들한테는 수줍음이 많거든요. 농담이나 장난도 잘 못하고. 옥주현 누나와는 정말 친해지고 싶지만 아무래도 뜻대로 안 될 것 같네요.(웃음)”
그는 조선시대가 배경인 액션영화 ‘최종병기 활’을 끝내고 곧바로 이번 뮤지컬 연습에 돌입했다. 조선에서 미국으로, 무술에서 춤으로 180도 바뀐 연기 환경을 나름의 노하우로 극복했다.
“체력적인 문제는 조금만 쉬면 회복이 되니까 괜찮아요. 관건은 제 마인드 자체가 완전히 새 작품에 몰입을 해야 한다는 거죠. 이번 경우에는 제 몸에 밴 전작들의 분위기를 최대한 빨리 빼내려고 거의 주입식 연습을 했어요. 새 작품의 대본을 계속 반복해서 읽고 연습하면서 말 그대로 제 몸과 마음에 주입시켰죠.”
# “최고의 원기회복제? 모텔 방에서 혼자 마시는 막걸리”
김무열은 ‘최종병기 활’에서 결혼 첫날밤 청나라 군사들에게 납치된 아내를 구출하고자 고군분투하는 무인으로 분했다. 아내 역은 배우 문채원이 연기했다. 두 사람은 극중 탈출을 감행하는 캐릭터들을 맡은 만큼 유독 뛰는 장면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든 것은 따로 있었다.
“열흘간 매일 10시간씩 늪지대처럼 움푹 파인 진흙에서 촬영한 적이 있어요. 하루 세 끼도 그곳에서 해결했죠. 계속 발이 푹 푹 빠지는데, 나중에는 아예 균형 감각이 사라지더라고요. 정말 ‘사람은 땅을 밟고 살아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죠. 촬영 끝내고 딱딱한 땅을 디뎠을 때의 그 희열이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어요.”
그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이른바 진흙땅 스트레스였다. 고된 하루 스케줄을 마치고 촬영장 인근 모텔에서 잠을 청한 뒤 이튿날 다시 이 진흙땅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런 빡빡한 일정 속에서 김무열은 특별한(?) 보양식으로 원기를 회복했다.
“최고의 원기회복제는 혼자서 안주 없이 마시는 막걸리였어요. 청승맞게 보여도 꽤 낭만적이에요. 덕분에 연기 집중력도 높아졌어요. 사실 함께 출연한 배우 박해일 형, 류승용 형과 술자리를 갖고 싶었는데 워낙 각자 소화해야 하는 분량들이 많다 보니까 뭉칠 시간이 없었죠.”
김무열은 ‘아가씨와 건달들’의 옥주현에 이어 문채원과도 아직 어색한 사이임을 고백하며 웃음을 지었다.
“영화 속에서 첫날밤도 못 지내고 생이별을 한 관계라서 그랬는지 실제로도 조금 어색했어요. 감독님은 오히려 그런 묘한 분위기가 작품에 잘 맞는다면서 좋아했죠. 정말 둘이 고생 많이 했는데 정작 친해지지 못해서 너무 아쉬워요.”
# “데뷔 전 몸무게 100kg, 독하게 살뺐죠”
김무열의 스무 살 시절은 불안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대학 낙방과 더불어 설상가상으로 집안 형편까지 기울었다. 그는 1년 동안 스스로를 완전히 버리다시피 하루하루를 방황했다. 연기자가 되겠다는 꿈도 잊어버린 채였다. 자연스레 몸집은 불어 결국 100kg에 이르는 거구가 되고 말았다.
“앞이 안 보였던 시기였죠. 모든 걸 그냥 놔버리고 아무렇게나 살았어요. 그러다 우연히 성균관대학교에서 진행된 연기 워크숍에 참여했는데 우수 수료자로 뽑혔죠. 그게 터닝포인트가 돼서 본격적으로 연기 공부를 시작했어요. 카포에라 기계체조 발레 재즈댄스 한국무용 등을 닥치는 대로 익혔죠. 어느새 살도 빠지고 악착같이 살아야겠다는 정신도 박히더라고요.”
그럼에도 시련은 또 찾아왔다. 김무열의 할아버지는 왜정시대 때 독립 운동을 했고, 아버지는 정계에 몸담은 바 있다. 이 같은 집안 분위기에서 연예인이라는 길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태종 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것처럼 한반도의 통일을 이룩하라는 뜻으로 제게 무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어요. 그런 제가 배우를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식구들 모두가 뜨악했죠. 연기 시작하고 나서 몇 년간 가족을 못 보고 살았어요. 이후 조금씩 갈등이 풀리면서 왕래를 했죠.”
# “고(故) 박용하 형, ‘광화문 연가’ 함께하자고 했는데…”
김무열과 배우 고 박용하의 관계는 각별했다. 둘은 2009년 영화 ‘작전’에 함께 출연한 것을 계기로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 고 박용하는 생전 설립한 소속사에 김무열을 영입할 만큼 깊은 애정을 보였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이틀 전, 김무열이 부친상을 당하자 빈소로 달려와 꼬박 밤을 새워준 큰형이기도 했다.
“참 고마운 형이고, 동시에 미운 사람이죠. 저뿐만 아니라 많은 후배들의 멘토이자 리더였어요. 지금도 지인들과 만나면 형 이야기를 많이 해요. 살면서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겠지만, 저한테 형은 영원한 정신적 멘토로 남아 있을 거예요.”
김무열은 고 박용하의 가족 다음으로 가장 먼저 빈소를 찾은 조문객이었다. 이틀간 아버지와 멘토를 한꺼번에 잃은 슬픔은 끝내 오열로 터져 나왔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지난 4월 막을 내린 뮤지컬 ‘광화문 연가’ 출연과 얽힌 가슴 아린 뒷이야기도 전했다.
“고 박용하 형이 제게 함께 출연하자고 제안했던 작품이었어요. 언젠가 저를 찾아와서는 ‘정말 괜찮은 뮤지컬이 있는데 너랑 꼭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었죠. 이런 이유 때문에 출연 여부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할 수밖에 없었어요. 작품을 하는 동안에도 자꾸 형 생각이 떠올라서 속상할 때가 많았죠.”
# “극단 반상회 창단, 대중들과 소통 위해 사비 털었죠”
김무열이 동료 배우 윤석원 김대명과 사비를 털어 지난 2006년 창단한 극단 반상회는 지금까지 네 번의 정기 공연을 가졌다. 5천원이라는 파격적인 공연료는 젊은 관객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공연은 매회 만원사례였고, 입소문이 퍼지며 대학로에서 꽤 인지도를 갖게 됐다.
“연기는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통로라고 생각해요. 연기의 배경이 뮤지컬이 됐든, 영화가 됐든, 연극이 됐든,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연기의 본질이죠. 연기라는 시스템 자체는 똑같은 거니까 앞으로도 다양한 장르를 오가면서 관객 여러분과 만나고 싶어요.”
김무열의 이 같은 각오는 초심이라는 두 글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옛 무인들은 ‘초심의 자세로 최후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말을 경전처럼 반복해 읽었다는데, 정말 김무열은 이름 그대로의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0년 전 초심을 10년째 간직해온 그의 우직한 발걸음이 믿음직스러운 이유다.
임재훈 기자 jayjhlim@seoulntn.com / 사진 = 송효진 기자
[ 本帖最后由 bonlife 于 2011-7-17 09:11 编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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