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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세상]어떤 노년의 괴물 같은 욕망
지금껏 살아온 삼십 수년의 시간을 한 번 더 살고 나면 나는 70대 중반의 노인이 될 것이다. 아직은 멀었다고 해야 하겠지만,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확실히, 예전보다는 꽤 빈번히, 노인이 된 나를 상상해 보게 된다. 집요한 인간적 욕망들로부터 자유로워져 지혜로운 평온함에 이르겠거니 하는 기대를 해보기도 하지만, 반대로, 육체는 늙어가는데 욕망이 더 강렬해진다면 그 아이러니를 어찌할 것인가 하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현대사회는 노년의 초연과 지혜를 칭송하지만 그들의 욕망과 육체는 불편해한다. 1935년생인 오에 겐자부로 선생이 일흔이 되던 해에 출간한 대담집에는 이런 문답이 있다. “건강 유지를 위해 하고 계시는 것이 있습니까?” “줄곧 클럽의 풀장에서 수영을 했습니다만, 노인의 벌거벗은 몸이 사람들 눈에 어떨까 싶어 일흔을 넘겨서는 그만두었습니다.” 세계적인 대작가인 오에 선생이건만 그의 육체는 타인에게 폐가 될 뿐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자 나는 쓸쓸해지고 말았다.
그런 쓸쓸함을 두 시간 동안 느낄 수도 있겠구나 하고 각오한 채로 영화 <은교>를 보러갔다. 영화는 70대 노시인 이적요의 노쇠한 육체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얼마 후 17세 소녀 은교의 건강한 육체가 화면을 채운다. 이 두 육체가 영화의 주인공이다. 70대의 육체가 10대의 육체를 욕망하기 시작하면서 서사의 기차는 출발한다. 욕망을 연구한 뛰어난 이론가들의 통찰을 내식대로 정리해 보자면 ‘욕망의 서사’는 대체로 다음 서너 개의 역을 경유한다.
첫째, 욕망은 ‘결핍’에서 출발한다. 이적요의 은교에 대한 욕망은 우선은 자신에게 ‘없는’ 여자(그에게는 아내도 딸도 없다)에 대한 욕망이겠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없는’ 젊음에 대한 욕망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은교를 안는 환상 장면에서 이적요는 젊은 날의 그로 되돌아가 있다. 둘째, 욕망은 ‘금지’를 통해 가중된다. 70대 노인이 17세 소녀를 욕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노욕이고 추문이다. 그런 시선은 슬픔과 울분을 키우고 욕망은 그것을 먹고 자란다.
셋째, 욕망은 ‘경쟁’을 통해 심화된다. 이적요의 제자인 서지우에게는 젊음이 결핍돼 있지 않으며 이적요에게만큼 강한 금지가 부과돼 있지도 않다. 그는 은교를 안을 수 있고 또 안는다. 서지우의 존재는 질투와 분노를 키우고 욕망은 그것을 먹고 사슬을 끊는다. 넷째, 욕망은 ‘자멸’로 완성된다. 욕망은 어느 한계를 넘으면 충동이 된다. 충동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제 주인을 파괴하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스승은 제자를 죽이면서 결국 자기 자신도 죽였다.
물론 이것은 극적인 상황이다. 세상의 모든 욕망이 이 네 단계를 모두 통과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노년의 욕망은 그 주인에 의해 일찌감치 처단되고 매장되고 부인될 것이다. 그래도 그것은, 없지 않고, 있다. 예술은 ‘있어야 할 것’을 그리기 이전에 먼저 ‘있는 것’을 그린다. 이 영화가 70대와 10대의 성기를 얼핏이나마 보여주는 것은, 성기가 불가피하게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고, 우리의 욕망이 그와 같기 때문이며, 노년의 욕망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나는 이와는 좀 다른 어떤 노년의 욕망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적요의 욕망은 결핍된 것에 대한 불가능한 동경이어서 아프다. 그런데 같은 70대 노인들인 현 대통령과 그의 멘토인 어떤 분에게는 죽어도 다 못 쓸 돈과 안하무인의 권력이 있을 것인데 왜 그들은 이미 있는 것을 그토록 열정적으로 추구하나. 그것은 인간적 욕망이 아니라 기계적 충동의 산물일까. 제 주인을 파괴하기 전에는 절대 멈추지 않는, 괴물 같은 그 충동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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